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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료>조광조,양팽손,송흠,박상, 최산두

최길용 2013. 5. 20. 19:45

 당시 성균관에는 훗날 기묘명현으로 추앙받는 김구, 박훈, 기준, 박세희, 윤자임, 양팽손 등의 유생이 있었다.

 

중종은 지난 가을 11월 19일에 조광조를 능주로, 김 정을 금산으로, 김 구를 개녕으로, 박 세희를 상주로, 박 훈을 성주로, 윤자임을 온양으로, 기준을 아산으로 귀양 보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꿈꾸던 젊은 사림을 풍비박산 내었는데, 그것도 분에 차지 않아 능주로 가 있던 조광조에게 사사의 극형을 내린 일이 있었다. 머잖아 누가 또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필시 간인(奸人)들이--심정과 남곤-- 젊은 사림의 씨를 말리려 함이다.'
  김 식이 혼잣말로 외친 간인들이란 심정(沈貞)과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을 두고 한 말이었다. 훗날 세상 사람들 역시 중종을 이용하여 기묘년의 재앙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이라 하여 화매(禍媒)라고 비웃었다.
  '지치(至治)란 정녕 꿈이었던 말인가. 왕도정치란 정녕 삼대(三代; 중국의 하, 은, 주의 세 왕조)에만 가능했단 말인가. 사림이 꿈꾸던 도덕정치가 한갓 이상이었단 말인가. 아, 나라의 정통을 새롭게 하려는 일이 이토록 요원하단 말인가.'
  나라의 정통을 새롭게 세우는 일이란 왕과 신하가 성리학의 군자가 되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을 말했다. 어깨를 늘어뜨린 김 식의 퀭한 두 눈이 흐려졌다. 아무리 체념하려 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해 추관(推官; 취조하는 관리) 앞에서 꿇어 앉아 자복하기를 '권세를 쓰는 자리에 있지 않았으므로 인물을 발탁하거나 배제하는 일이 전혀 없었으며, 패거리(朋比)를 맺고 반대만 하는 습관으로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을 날로 글러가게 하였다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피를 토하듯 외쳤지만 중종은 오히려 추관들에게 엄하게 다스릴 것을 명했다. 〈대명률〉의 간당조(姦黨條)를 적용한다면 조광조, 김 정, 김 식, 김 구 등은 조정의 공론을 뒤집고 정사를 잘못되게 한 간당이라 하여 모두 목을 베고 처자를 종으로 삼으며 재산을 관에서 몰수하는 죄에 해당되었다. 또한 윤자임, 기준, 박 세희, 박 훈 등은 간당을 추종한 죄로 1등을 감하여 각각 장 1백대에다 유형 3천리에 처해져야 했다.
  중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간인들의 손을 들어준 실로 어이없는 비극이었다.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 식 등은 절규에 가까운 옥중상소를 올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두 덜 되고 어리석은 것들이 좋은 때를 만나 경연에 참가하여 전하를 가까이 모셔왔사옵니다. 거룩한 임금만 믿고 어리석은 소견들을 털어놓다가 여러 사람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지만 임금만 알았을 뿐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았나이다. 우리 임금을 요순 같은 임금 같이 되게 하자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겠나이까. 하늘이 내려다보거니와 다른 마음은 아예 없사옵니다.
  신 등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지만 사화(士禍)가 한번 시작되면 장차 나라의 운명이 우려되지 않나이까. 대궐문이 가로막혀 품은 생각을 아뢸 길이 없사옵니다. 말도 못하고 영영 하직하자니 차마 못할 일이옵니다. 한번만 전하가 직접 신문하여 준다면 만 번 죽어도 한이 없겠사옵니다. 정은 넘치고 말은 중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겠나이다.〉
  
  돌변한 중종의 마음은 이미 그들을 떠나 있었다. 최측근의 시종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냉혹하게 내칠 수 있다는 것을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중종은 늙은 대신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즐겼다. 겁 많고 나약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천하에 알렸다. 왕이 된 지 실로 14년 만에 자신의 고집대로 왕명을 지시하는 쾌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적셨다.
  중종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율을 감추고 겉으로는 노기를 띠었다. 늙은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 등이 울면서 거듭거듭 중종에게 진언했지만 극형만은 면해 주었을 뿐 사림 모두에게 간당이란 누명을 씌우고는 임명장을 모두 빼앗고 장을 쳐서 유배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조광조 등의 죄를 율(律)에 적용하면 과연 사사해야 하겠으나 깊이 생각하고 또 대신의 말을 반복해서 생각하니 사사하면 놀랄 듯하다. 조광조 등 4인은 사형을 감해서 임명장을 다 빼앗고 장 1백대를 쳐서 먼 지방에 귀양 보내며, 윤자임 등 4인은 임명장을 다 빼앗고 장 1백대를 쳐서 속죄시키고 거주제한을 시킬 것이다.'
  중종은 거칠게 분노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요순의 임금 같은 천품을 타고 나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은 공자도 아니고 맹자도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중종은 군자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니 하늘의 도(道)를 닦아 지치를 펴서 요순의 임금이 되라고 날마다 밀어붙이는 조광조, 김 식 등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심성이 무르고 자리보전에 시달려 왔던 중종에게는 지치는 고사하고 재위 내내 부실했던 왕권을 지켜내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왕권을 갈망하던 중종에게는 성인군자가 되어 왕도정치를 펴라고 주장하는 조광조, 김 식 등은 떼어버리고 싶은 혹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힘없는 중종이 마음속으로 원했던 것은 왕도가 아닌 왕권이었다.

 

생진사시에 합격하거나 입학 자격을 취득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면 유생이라 불렀는데, 선발된 200명의 유생들 중에는 음주가무를 좋아하여 삼삼오오 작당하여 한밤중에 성균관 담을 넘어 기방을 기웃거리며 술을 몰래 마시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조부나 부친의 벼슬을 내세워 은근히 과시하며 우쭐거리는 사람도 있고, 배타심이 강하여 고향 사람끼리만 몰려다니며 지방색을 조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사교나 친화력이 부족하여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도 있었다. 전라도 능주에서 올라온 양팽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초라한 옷차림의 양팽손을 보면 퀴퀴한 냄새라도 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저만치서 걸음을 멈추는 유생도 있었다. 헝겊으로 덕지덕지 기운 무명 바지저고리를 사철 내내 입고 다니니 외모만 보면 영락없이 한미한 집안의 시골뜨기 서생이었다. 그러나 깡마른 얼굴에는 강기가 흘러넘쳤고, 퀭한 두 눈에서 뿜어지는 눈빛은 어리어리한 유생들을 압도했으며 눈썰미가 남달라 그림을 잘 그렸다.
  시골뜨기 양팽손이 전라도 관찰사이자 청백리로 향리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송흠(宋欽)의 제자라는 것을 안 사람은 조광조뿐이었다. 성균관 입학 전에 6살이나 어린 양팽손이 물어물어 용인에 살던 조광조의 초당을 찾아가 패기 있게 도학을 논하며 며칠 동안 초당 사랑채에서 기숙했던 적이 있고, 더구나 두 사람은 같은 해 양팽손은 생원시 1등으로, 조광조는 진사시 1등으로 합격했던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능주목사골의 옛사진으로 1913년 사진이다. ⓒ프레시안

'효직(孝直; 조광조의 자)은 아직도 용인 선산(先山)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능주 쌍봉사 동쪽 계곡의 동토에 묻혀 있다지. 억울하고 통분할 일이로다.'

 

도학이란 유학의 관념이나 문장에 빠지지 않고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말했다. 도학의 목적은 한마디로 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의 도학 정맥은 여말선초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길재로부터 발원하여 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쌍봉사 가는 길은 동북쪽 골짜기로 나 있고, 구례마을을 지나 예재를 넘어가는 보성 길은 동남쪽 골짜기로 나 있었다. 중조산(현 계당산)은 능주와 보성을 경계 짓는 큰 산으로 많은 산자락과 골짜기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허공의 빗방울이 증조산 정상에서 바람에 휩쓸려 보성 쪽으로 떨어지면 보성강물에 섞였다가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능주 쪽으로 떨어지면 지석천을 거쳐 영산강으로 합류했다.
논밭을 불문하고 고인돌이 널려 있는 것은 능주 땅의 특징이었다.
  
  '정암 어른이 돌봐주실 것이야.'
  여인은 쌍봉사에 가면 조광조의 혼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여인은 능주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주막 술청어멈에게 조광조의 시신이 쌍봉사 동편 은밀한 곳에 묻혀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술청어멈의 얘기는 능주 고을 사람들이 모두 쉬쉬하면서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작년 초가을에 서울에서 낙향한 양팽손이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 염한 뒤 능주 땅에서 가장 오지인,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쌍봉사에서도 오리쯤 더 들어가는 증조산의 그윽한 산자락에 묻어주었던 것이다. 그곳은 약초꾼 대엿 명이 화전을 일구고 사는 산촌이므로 조광조의 시신이 훼손당할 염려가 없는 산자락이었다.
  패기에 찬 32세의 양팽손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극형을 받은 죄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를 갖추어 염하고 장사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능주 현감과 아전들이 묵인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능주 출신의 선비 양팽손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젊은 양팽손은 능주 백성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능주 출신으로서 생원시 1등 합격에다 문과에 급제한 선비는 양팽손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양팽손은 소싯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7세 때 현감이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그해 가을 전라도 감사(종2품, 관찰사의 별칭)가 고을을 순회하면서 소년 양팽손을 불러 천지일월(天地日月)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하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천지는 나의 도량이 되고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된다.
  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
  
  이에 감사가 크게 칭찬하며 '해학(諧謔)의 모습이요, 추월(秋月)의 정기(精氣)라 훗날 용문(龍門)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크게 떨치리라'라고 격려문을 써주었던 것인데, 그 뒤 소년 양팽손은 양신동(梁神童)으로 불렸다.
  지금은 비록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낙향한 양팽손이지만 한때는 경연에 나아가 중종과 국사를 논하던 대간으로서 사간원 정언(정6품)과 사헌부 지평(정5품)을 지냈으니 외직의 현감(종6품)이나 미관말직의 아전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여인(정암의 후실?)을 맞이한 스님은 쌍봉사 주지 혜공(惠空)이었다. 삭발한 지 오래 된 듯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50대의 나이로 보였다. 웅얼거리는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는 60대의 노승으로 느껴지게도 했다.
  "자, 보살이 머물 방을 정해 주겠소. 저 동암에는 학포 선생이 와 계시고, 저 백운암이나 백련암에는 머잖아 귀한 손님들이 올 것이라 하여 비워 두고 있소. 그러니 보살은 소승이 기거하는 주지실 옆 골방밖에 잘 자리가 없구려."
  "대사님, 고맙습니다."
  혜공의 말대로라면 귀한 손님들이 쌍봉사에 모여들 모양이었다. 도량이 말끔하게 청소된 것을 보면 쌍봉사에서 무슨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절이란 부처님이 계신 다장(茶莊) 같은 곳이오. 그러니 누구나 차를 마시고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겠소."
  "절에는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신지요."
  "소승이 혼자 절을 지킨 지 오래 됐소이다."
  "이렇게 큰절에 혼자 계신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노승은 돌아서며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럴 만한 사연이 있지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곳 쌍봉사는 세조의 원찰이거니와 임금님의 지시가 내려와 방백(方伯)의 보호를 받고 있소이다."
  
  혜공은 능주까지 불어 닥친, 향교 교생들의 불상을 파괴하는 훼불과 승려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법란(法亂)에 고개를 저었다. 지방향교가 위세를 부리면서 불교를 핍박하는 배불이 공공연하게 자행돼 왔던 것이다. 절을 태우고 승려를 몰아내면 저절로 공맹(孔孟)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향교의 교생들이 촌민들을 선동하곤 했다. 공자를 맹신하는 항교 교생들의 만행이었다.
  실제로 세종 때 능주에서 향교 교생들이 재암(齋庵) 11곳을 불태워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현령의 허가를 받아 재암을 불태워버린 사건으로 숭유(崇儒)를 표방하면서도 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허가한 세종에게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놀란 세종은 군정의 급한 일이 아닌데도 사건의 초기 진화를 시도했다. 자신이 궐 안에 내불당을 허락하자 능주의 백성들이 지방민으로서 가장 먼저 반발하고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삼경의 늦은 시각인데도 의금부의 부진무(副鎭撫) 강맹경(姜孟卿)을 화급하게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전라도 능성현의 교생 양회 등이 재암 11곳을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이 무슨 변괴인가. 그대는 가서 국문하고 낱낱이 과인에게 보고하라."
  강맹경은 바로 말을 타고 능주로 달려가 조사한 뒤 세종에게 자세하게 아뢰었다.
  "신 감사가 사헌부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역승(驛丞) 서구성(徐九成)으로 하여금 도내를 다니면서 재암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게 하였는데, 구성이 능성에 이르러 향교 생도 양회(梁淮) 등의 공초를 가지고 말하기를 '만일 새로 지은 것이 있는데도 고하지 아니하면 죄를 받아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니, 회 등이 평소 고을에 재암이 많은 것을 분하게 여겼으므로, 이에 현령 최추(崔湫)에게 고하여 불살라 없애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해 주니 회가 무리를 이끌고 재암 11곳을 불살라 버렸는데 모두 새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추와 회 등의 저지른 죄가 가볍지 아니하므로 이미 주현(州縣)에 나누어 가두게 하였사옵니다."
  강맹경은 새로 지은 불법 재암은 태워버려도 죄가 되지 않은데, 이미 지어진 재암을 태워버렸으므로 죄가 가볍지 않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능주의 현령과 항교 교생 양회 등이 하옥은 됐으나 그들은 양심범 같은 대접을 받았고 그런 분위기는 중종의 기묘년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혜공의 은사 도반이 탁발을 나갔다가 마을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개죽음을 당한 사건도 있었고, 화적으로 위장한 향교 교생들이 쌍봉사에 들이닥쳐 협박을 일삼으니 승려들이 송광사나 화엄사 등 안전한 절로 떠나거나 환속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니 자연 쌍봉사도 폐사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세조의 원찰이라는 명분과 혜공이 스스로 닦은 법력으로 절을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양팽손이 12세 때 쌍봉사에서 사서삼경을 독학하였다.

"천도재라…. 망자를 위해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지요. 마침 학포 선생이 조 대감의 영정을 그리고 있고, 소승이 초가 사당을 짓는 데 울력했으니 잘 되었소이다. 보살이 기도하는 것도 조 대감을 추복(追福)하는 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 되겠구려."
  혜공은 그제야 여인의 정체를 이해했다. 여인은 조광조를 사모하여 수절하고 있는 아낙이 틀림없었다. 올린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남자에게 마음을 바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인에게 한 남자란 두말할 것도 없이 조광조일 터였다.
  여인은 금비녀를 쌍봉사에 시주하고 재를 지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팽손은 여인을 바라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양팽손이 동암에 한 달째 머무르고 있는 까닭은 조광조의 영정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혜공이 목수를 데리고 지은 초가사당에 안치할 조광조의 영정이었다. 며칠 후면 조광조와 인연 있는 호남의 선비들이 초가사당에 모여들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양팽손은 이미 사간원 정언으로 근무할 때부터 차를 음다했던 적이 있다. 감찰 업무를 보기 전에 반드시 차를 마시며 다례(茶禮)를 했는데, 차 마시는 그 시간을 대간들은 다시(茶時)라고 불렀다. 차는 각성의 효과가 있어 흐린 정신을 맑게 해주고 피로를 덜어주는 효과가 있으므로 무엇이건 시비를 가려야 하는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들은 다시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세상도 추웠지만 지난겨울 날씨도 혹독했습니다. 찻잎이 동해를 입어 죽었다 살아나오니 이제야 차를 만들 만한 싹이 나오지 뭡니까. 수확한 양은 금싸라기처럼 소량이지만 맛과 향은 여느 때와 비교할 바 아닙니다. 여기에도 자연의 섭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양팽손도 혜공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다신(茶神)이 내린 듯한 차입니다. 차향을 맡아보니 천도(天道)를 알겠습니다. 겨울이 혹독했던 것은 봄이 가까워진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늘은 차를 통해서, 계절을 통해서 도(道)를 말하고 있소이다."
  "학포 선생께서는 서화잠심(書畵潛心)의 경지에서 노니신 줄만 알았더니 다인(茶人)의 경지를 즐기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서화잠심이란 현실에서 물러나 글과 그림으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말했다. 양팽손은 낙향하여 서화로 잠심하며 세상을 잊곤 하였는데, 조광조의 영정을 그리는 작업도 그러한 일과의 연장인 것이었다. 


  

 
적벽은 신재 최산두 선생이 유배왔던 인근에 있었는데 신재 최산두 선생이 중국의 적벽보다 뛰어나다며 적벽이라 명명했다. 현재는 동복호에 많이 잠겼지만 그 수려한 모습은 여전하다. ⓒ프레시안  


 최산두(崔山斗)--조광조와 한 날 한 시에 서울을 떠나 조광조는 능주로 와 한 달 후 사사 당했고, 그는 동복 나복산(蘿葍山)의 한 민가에서 호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짓고 지금까지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최산두가 없었더라면 공물인 매를 제 때에 바치지 못하고 빚에 쪼들려 결국에는 유랑민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매잡이 농부가 자청해서 최산두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최산두가 중종에게 진언하여 매가 드문 남방에서 매를 잡아 진상하는 관행을 혁파했기 때문에 남방의 매잡이들이 매를 잡지 못하여 매 한 마리 대신에 베 40-50필을 바치던 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산두는 중종 12년 8월 24일 조강(朝講)에 나아가 인천 출신인 시강관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매의 진상 폐단에 대해서 아뢰었던 적이 있었다.
  검토관으로 조강(朝講; 아침강론)에 참여한 최산두가 먼저 아뢰었다.
  "매는 본래 남쪽지방에서 나는 것이 아니어서 한 마리의 값이 베로 거의 40-50필이나 되는데도 각 고을에서 감사에게 올리면 감사는 받아서 나라에 진상하고 나머지는 선물로 각처에 나누어주면서 하찮은 물건처럼 여기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백성들이 당하는 폐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양계(兩界; 동북계와 서북계)에서 토산물을 바치는 규례에 따라 남쪽지방에 다같이 바치도록 요구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것 같사옵니다."
  중종은 뜻밖에도 최산두의 진언을 조금 받아들였다.
  "매를 진상하는 것은 햇것을 올리는 제사에 산 꿩을 바치는 것과 같은 일이니 없앨 수는 없다. 양계는 토산지이지만 남방은 산지가 아니니, 굳이 봉진(封進)하게 하면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칠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최산두와 조강 전에 응방을 없애자고 입을 맞춘 이성동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매를 진상하는 것의 폐단에 대해서는 시종관과 대간들이 이미 자세히 논계하였으며, 남방은 토산지가 아니니 폐지해야 하옵니다. 함경도의 가을철매(秋鷹)와 사냥매 소응(巢鷹)을 잡아 바치는 폐해도 많사옵니다. 매사냥하는 사람이 진상이라는 핑계로 여염에 드나들며 닭이나 개를 때려잡아도 힘없는 백성은 막지 못하여 뒤숭숭하옵니다. 매를 바친 뒤에는 그 나머지가 재상과 시종에게 내려지기도 하니, 폐단은 지극히 크나 쓰임은 지극히 가볍사옵니다. 응방을 둔 것이 놀이 도구에 가까우니 폐지한들 무엇이 해롭겠사옵니까."
  중종은 응방의 폐지만은 허락지 아니하였다.
  "응방을 둔 것은 놀이 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햇것을 올리는 제사를 위하여 둔 것이므로 부득이한 일이니 폐지할 것이 없다."
  응방(鷹房).
  매를 사육하고 잡는 일종의 관청인데, 연산군 때 그 폐단이 절정에 달하였다. 연산군은 응방에 서울을 수비하는 갑병(甲兵)과 군역에 복무하는 장정인 정병(正兵)을 각각 400명을 두었고, 이것도 부족하여 내금위에서 70명, 사복(司僕) 10명을 대기시켜 놓고 매를 잡게 하였다. 이들이 민가에 끼치는 민폐는 가을 논을 뒤덮은 메뚜기 떼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으므로 중종 때에 이르러 최산두 등이 응방을 폐지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응방의 혁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남방에서 매를 진상하는 일만 중지시키는 데 그쳤다.
  그래도 최산두의 공은 남방의 지방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그는 유배를 와서 뜻밖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반듯한 삼 칸 초가를 제공받았고, 능주와 이웃한 동복의 향교 교생들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자주 찾아주어 외롭지 않았다. 최산두가 유배 중에도 쌍봉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과 호의가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망향정은 그 적벽을 바라보고 있는 정자이다. 최근에 물에 잠긴 마을 주민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프레시안


  "동복에서 온 최산두라고 합니다."
  "존함을 익히 들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최산두는 조광조보다 1살 아래의 나이였고, 광양의 둔전(屯田)을 일구는 가문에서 태어나 김종직, 김굉필을 사숙했고 15세 때 〈통감강목(通鑑綱目)〉 80권을 2년 동안 독파한 후 18세 때 상경하여 조광조, 김정, 김안국 등과 교유하며 '낙중군자(洛中君子)'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혜공이 위로의 말을 먼저 건넸다.
  "적소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먼저 찾아가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을 받은 자는 적소에 있어야 하고, 스님은 법당에 있어야지요. 그게 법도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는 법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오늘처럼 예외는 있는 법이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불가에서는 지킬 예도 없고 만들어진 법도도 없다고 봅니다. 그것에 얽매이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고자 함이지요. 그래서 공(空)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혜공이 던지는 말에 최산두는 오랜 만에 고승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없다기보다는 무상하고 허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허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입니다. 본래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불도들은 불성(佛性)이라고도 합니다. 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소승은 수행하고 있습니다. 불성을 깨치어 행동하고 말하면 그것을 우리 빈도(貧道)들은 해탈이라고도 하고 성불이라고도 합니다."
  최산두는 논박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가볍게 응수하고 말았다.
  "석가는 공자와 노자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소승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승이 알 수 있게끔 가르침을 줄 수 없겠습니까."
  "공자는 수신하여 세상에 나아가 지치를 펴는 데 도(道)가 있다 하고, 노장(老壯)은 자연으로 돌아가 세상을 잊어버리는 데 도가 있다 하고, 석가는 자연 속에서 수행은 하되 세상의 일을 외면하지 않는 데 도가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혜공이 합장을 하며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최산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문대로 기묘명현의 반열에 오른 선비답게 최산두는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15세 때 〈통감강목〉 80권을 들고 석굴로 들어가 수천 번을 읽고 나왔을 때 주변의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는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혜공은 합장한 채 소리 나지 않게 중얼거렸다.
  '임금님에게 〈성리대전〉을 강할 26인의 선비 중에서 최 공이 첫 번째로 뽑혔다는데 과연 사실이군 그래.'

......
  "차는 술과 달라서 따르는 순서가 없을 듯싶사옵니다."
  최산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강호에 고수가 따로 없소이다. 보살이 바로 고수입니다."
  혜공도 맞장구를 쳤다.
  "최 공의 도학이나 소승의 불도보다 높은 것이 다도인가 봅니다."
  

 
물염정은 적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정자이다. 신재 최산두 선생이 동복에 유배를 오자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신재 선생에게서 수학하고자 찾아든다. 이때 꼭 이 물염정을 거쳐 가야했는데 그래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는 곳이었고 현재도 많은 시액이 걸려있다. 특히 이곳은 장성사람 하서 김인후가 신재선생을 뵈러 갈때 꼭 들른 곳이다. ⓒ프레시안  


  혜공은 최산두에게서 귀양살이의 고독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물었다.
  "최 공께서는 적거(謫居)의 생활이 심히 외롭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술을 구해 실컷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제가 태어난 광양의 백운산과 바다의 풍경만 수려한 줄 알았는데, 동복의 숨은 비경도 한 폭의 수묵화입니다. 말로만 듣던 중국의 적벽 진경(眞景)이 바로 동복에도 있소이다. 적소를 드나드는 제자들에게 동복천의 병풍바위를 앞으로는 적벽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조물주가 이 세상에 내려준 작품이라 할 만한 적벽이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복에도 있습니다.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최산두는 적거 생활이 고독하기는커녕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양팽손이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교생들에게 '지금 아는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을 걱정하며 물리치는 데 반해서 그는 제자들도 활발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민심도 따뜻하고 향학의 열망도 대단합니다. 전하께서 동복으로 보내주신 성은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해배가 된다 해도 동복을 떠나지 않고 적벽 노루목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


기묘사림 중에서 최산두는 분명 특이한 인물이었다.

김식은 기회를 기다리려고 도망치다 자살하였고,

양팽손이나 유성춘, 윤구 등은 세상을 벗어나 산촌에서 잠심(潛心)하고 있고,

박상(朴祥) 등은 분함을 억누르지 못해 화병이 날 지경인데,

최산두는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유배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혜공은 최산두의 얘기를 들으면서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시절에도 인연이 있으니 시절을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사람이 시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절이 인연 따라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소극적인 처세 같으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처세가 바로 기다림이었다. 봄을 갖고 싶다 하여 겨울을 건너뛸 수 없는 것처럼 기다림이란 조용히 순리를 따르는 방편이었다.
  혜공의 눈에는 최산두가 기다림을 체득한 선비같이 보였다. 그는 유가의 도학자이면서도 불가의 수도승 못지않게 인연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작년 가을에 조광조가 쌍봉사에 왔을 때 혜공은 이런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났다.
  "세상을 맑히는 데 유가의 공이 큽니다. 삼강오륜을 벗어나면 소인이요, 그것을 지켜 실천하면 군자입니다. 얼마나 명쾌합니까. 하오나 명쾌한 것이 병통입니다. 불가에는 소인과 군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깨치면 모두가 부처입니다. 그러니 갈등이 없고 당(黨)이 없습니다. 투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연기(緣起)만 있을 뿐입니다."
  조광조는 혜광의 변재(辯才)에 놀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조금은 아쉬워했다.
  "사람이 하늘과 같다면야 어디 소인이 있고 군자가 따로 있겠소. 하늘의 도가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가에도 깨치지 못한 사람을 일러 중생이라 하지 않습니까. 중생이 있는 한 도덕이 있고, 질서가 있어야 세상이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불가에서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수도(修道)라면 사람이 하늘을 본받으려고 수신하는 것이 도학이 아니겠소. 다만 정치를 바로세우고자 달려오느라고 소인들에게 인을 주지 못하고 덕을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인과 덕을 불가에서는 자비라고 합니다."
  빗줄기가 오락가락했다. 지금은 비가 잠시 멈추어 푸른 하늘이 언뜻 보였다. 혜공이 창을 열어젖히자 축축한 바람이 방안으로 몰려들었다.
  
  "양공이 동암에서 기다리시는데 지금 만나시겠습니까."
  "세창(世昌; 박상의 자)이 오면 함께 동암으로 올라가겠습니다."
  광주에 내려와 있는 박상도 쌍봉사에 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박상은 조광조보다 8세 연상으로 성격이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로서 포용력이 부족한 듯하나 그는 담양부사 시절에 순창군수인 김정과 함께 폐비 신씨(중종의 정비) 복위를 위한 상소를 목숨 걸고 올려 폐비를 모의한 박원종, 남곤 등의 훈구파를 견제하고 조광조, 김식 등의 사림파에게 힘을 실어준 기폭제가 됐던 선비였다.
  박상은 성격이 너무 대쪽같아서 대간들과 자주 부딪치므로 내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직으로만 돌았다. 조광조도 작년 봄에 그의 인품을 중종 앞에서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사람 된 품이 학문에 박식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재능과 덕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품행이 꿋꿋하고 결백하여 세상 사람들과 잘 휩쓸리지 않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의 눈에 나서 가끔 비웃음을 받기도 합니다. 그는 평생의 뜻을 오로지 퇴폐해진 것들을 일소하고 다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인재입니다.'
  심정이 양천에 소요당(逍遙堂)을 짓고 기둥에 거는 주련을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에게 부탁했을 때 박상은 다음과 같이 글을 보내 심정을 조롱한 적이 있었다.
  
  반산(半山)에 음식상을 차렸고
  추학(秋壑)에 술잔을 열었도다.
  半山排案俎
  秋壑闢樽盂
  

 
  쌍봉사 삼층목탑은 84년까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었는데 불이 나는 바람에 86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안되는 목조삼층탑이다. ⓒ프레시안


  심정은 주련을 뜯어내며 '간을 빼어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노옴!' 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반산은 왕안석(王安石)의 호이고, 추학은 가사도(賈似道)의 호인데, 그들 모두 송나라를 망친 대신이었던 것이다. 박상이 위와 같은 주련의 글을 보낸 것은 심정 너야말로 조선을 망쳐먹을 간신이라는 직격탄이었다.

 


  박상이 호남 사림의 시조 격이 된 것은 아버지 박지홍이 본향인 충주에 머물지 않고 처가를 따라 광주 방하동(芳荷洞) 봉황산 아래 자리를 잡아 살았기 때문이었다.
  
  박상은 최산두와 약속한 대로 정오가 조금 지나자 쌍봉사에 나타났다. 그는 거상이 끝났는지 상복을 벗고 있었다. 기묘년에 벼슬을 못하고 조광조 등과 어울리지 않은 것은 거상 중이기 때문이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그로 인해 그는 국문을 받고 삭탈관직 당하는 화는 피할 수 있었다.
  최산두가 해탈문으로 달려 나가 박상을 맞아들였다.
  "눌재(訥齋; 박상의 호) 형님, 죄인의 몸이라 문상을 가지 못해 송구합니다."
  "경앙(景仰; 최산두의 자), 어려운 시절에 어찌 법도대로 살 수 있겠소. 그러니 미안해 할 것 없소."
  "거상은 잘 치르셨는지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이오. 어머니도 잃고 동지들도 잃었으니 화를 입지 않은 나라고 어찌 안색이 좋을 리가 있겠소. 거상 중에 노천(김식의 자)의 소식을 듣고도 달려가 보지 못해 마음이 무겁소이다."
  "눌재 형님, 천장(天章; 유성춘의 자)이나 형중(亨仲; 윤구의 자)에게 소식을 전했습니까."
  "형중은 병으로 오지 못하겠다고 하고, 천장은 연락이 닿지 않았소."
  유성춘은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파직되었고, 해남 출신인 윤구 역시 예조좌랑으로 있다가 파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 있는 처지였다. 박상과 유성춘, 윤구 등은 벼슬과 상관없이 교우가 두텁고 오래 전부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사람들은 호남의 삼걸이라고 불렀다.
  "동부승지 어른도 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부승지 어른은 학포의 스승이니 학포가 잘 알 것이오."
  양팽손의 스승이라 하면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별명이 붙은 송흠(宋欽)을 말했다. 양팽손이 16세 때 장성에서 나세찬, 송순 등을 가르치고 있던 송흠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삼마태수란 송흠이 수령의 임기가 끝날 때 다른 부임지로 가면서 세 마리의 말만 받아 가므로 생겨난 그의 별명이었다. 고을 백성들이 수령이 떠날 때 전별금으로 양마(良馬) 여덟 마리를 관행으로 주어 왔던 것인데, 송흠은 자신이 타는 말 1필과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을 각각 1필씩 전체 3마리의 말만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삼마태수란 단어는 백성들 사이에 어느덧 청백리를 상징하는 고사성어가 돼버렸다.

시절인연...
오늘의 한마디 / 2006-04-05 오후 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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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시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절이 인연 따라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소극적인 처세 같으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처세가 바로 기다림이었다."

스승 송흠이  "학포는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있어 산수(山水)가 때로는 동지 같겠군. 그렇지 않은가."
  "능주의 빼어난 풍광을 소재 삼아 서화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산수도(山水圖)가 바로 여기 풍경과 비슷하구먼."
  "그렇습니다. 복숭아 산지인 이곳 능주에 복사꽃이 한창 피어나면 신선들이 사는 선계(仙界)가 돼버립니다."
  송흠은 성격이 대쪽처럼 곧아 타협을 잘 못하는 양팽손의 인품을 알기에 가능한 현실 정치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도학은 입신양명보다는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수신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양팽손에게 있어서 서화는 단순한 은둔생활의 벗이 아니라 도학을 실천하는 수신의 방편이라 할 수 있었다. 송흠이 보았던 양팽손의 산수도 제화시(題畵詩)는 이런 것이었다.
  
  강 넓어 티끌 날아오지 못하고
  여울이 시끄러워 속세의 말 들리지 않네
  고깃배는 오락가락하지 마라
  세상과 서로 통할까 두렵네.
  江濶飛塵隔
  灘喧俗語聾
  魚舟莫來往
  恐與世相通
  
  산수도 제화시 속에는 양팽손의 마음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능주의 산중에 묻혀 세상의 티끌을 멀리하고, 세상의 온갖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겠다는 다짐의 시이기도 했다.

 

양팽손은 삭탈관작 당한 처지였으므로 외출할 때 역의 말을 타지 않고 집에서 기르는 소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소가 말보다 느리고, 무엇보다 지구력이 부족하여 오래 타지 못하는 단점은 있으나 어린 시절 월곡마을에서 논밭을 오가며 탔던 그런 즐거움은 되살려 주곤 했다. 양팽손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 소를 타고 가며 시를 지은 적도 있었다.
  
  소를 타는 것이 좋은 줄 몰랐더니
  이제 말이 없어 알게 되었네
  석양의 방초 우거진 길에
  봄의 해도 천천히 가네.
  不識騎牛好
  今因無馬知
  夕陽芳草路
  春日共遲遲
  
  그런데 양팽손은 스승인 송흠이 소를 타는 것도 거부하기 때문에 자신도 쌍봉사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금능을 조금 지나 발용산 산자락 아래 뜬바우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에야 송흠이 말했다.
  "학포, 나는 걸어 갈 테니 자네는 소를 타고 가게나. 나는 원래부터 소를 타보지 않았다네."
  "스승님이 걸으시는데 어찌 제자가 소를 타고 가겠습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네. 도반(道伴)처럼 걸어가세."
  송흠은 허허허 웃으면서 자신이 사적인 용무로는 관의 말을 타지 않는 이유를 얘기했다. 송흠에게는 역마에 얽힌 뼈아픈 젊은 날의 기억이 있었다.
  
  〈송흠의 정착지는 장성이지만 출생지는 영광이었다. 서울에서 나주는 영광을 거쳐 가야 했는데, 나주는 송흠이 평소에 좋아했던 선배 최부의 고향이었다.
  두 사람은 홍문관에서 함께 일했던 적이 있었다. 최부가 홍문관 응교(應敎; 정4품)로 일할 때 송흠은 최부 밑에서 일을 보좌했던 것이다. 고향이 이웃인 두 사람은 함께 휴가를 얻어 시골로 내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송흠이 최부가 사는 마을로 찾아갔다. 송흠은 타고 온 말을 마당가에 매어두고 최부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오랜 만에 재회하여 이런 저런 정담을 나누었다. 한참 만에 최부가 송흠이 타고 온 말을 보더니 말했다.
  "저 말은 무슨 말인가."
  "역마지요."
  역마는 관리가 길을 떠날 때 나라에서 지급하는 말이었다. 송흠은 별 생각 없이 말했는데, 최부는 안색을 바꾸면서 꾸짖었다.
  "저 역마는 자네 고향집까지만 타고 가라고 빌려준 것이네. 자네 고향집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것은 사적인 일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는가."
  최부는 휴가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송흠의 잘못을 대간에게 알려 파면시켜버렸다. 송흠이 파면되어 최부에게 찾아와 하직인사를 하자, 최부가 송흠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네 같이 젊은 사람일수록 앞으로 큰일을 할지 모르니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네."
  최부의 말을 듣는 순간 송흠은 섭섭했던 마음이 씻어지고 두 눈에서 헛것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파면시켰던 최부야말로 자신의 장래를 참으로 걱정해주는 고향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양팽손은, 권력에 무임승차하지 않고 공사(公私)를 분명하게 처리하는 스승의 인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새삼 이해되었다. 사실 송흠이 후배나 제자뻘 되는 젊은 도학자들과 어울렸다면 진즉 영상의 자리 하나는 꿰찼을 터인데, 자존심이 세고 비위가 약한 그는 그러지를 못했다. 요직으로 불려갔다가도 부모 봉양을 핑계로 외직으로 나와 버렸다. 그러니 조정을 장악한 조광조 등의 젊은 사림과는 인연이 없었다. 송흠 자신이 권력을 탐탁지 않게 여기어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을 뿐더러 개혁파인 젊은 사림들도 나이 든 송흠이 요직으로 들어오는 것을 걸림돌처럼 부담스러워했던 것이다.
  송흠이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이란 막강한 자리에 임명되었을 때도 그는 서울로 들어오지 못했다. 젊은 간원(諫院)이 명분을 만들어 중종에게 송흠의 벼슬을 교체하라고 아뢰어 뜻을 관철했던 것이다.
  "대사간 송흠은 80세의 부모가 영광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 전주부윤으로 있을 적에도 사임하고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였습니다. 이번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으나 틀림없이 벼슬자리에 나오지 못할 것이며 혹시 나온다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고향으로 가서 부모를 봉양할 것입니다. 장관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으니 교체하시기 바랍니다."
  명분은 장관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공사와 시비를 정확하게 따지는 송흠이 젊은 간원들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훗날 사신(史臣)도 이 일을 두고 〈중종실록〉에 이렇게 평하였다.
  〈송흠은 관직에 있을 때 청렴하고 근신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다만 신진 선비들은 스스로 맑은 부류라 하고, 원래부터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식견이 밝아 쓸 만한 사람이라도 못난 사람이라고 하고, 자기들에게 붙는 사람이면 추천하곤 하였다. 대간들과 시종관들이 모두 송흠의 제자였기 때문에 추종하는 사람이 많았다.
  송흠은 여러 차례 수령이 되어 외방에 있었고, 또 연로하여 신진들과 서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사간원에서 그를 논박하려 해도 헐뜯을 말이 없으므로 지방에서 올라오지 않는 것을 구실 삼아 교체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의도는 사실 규탄한 것이다.〉
  

 
  현학정은 베틀바위가 있는 산중턱에 있으며 최근에 중창한 누정으로 처사 정근이 건립했다. ⓒ프레시안


  송흠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학포, 춥지 않는가."
  "지금은 초여름이옵니다. 한데 춥다니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란 말 잊어먹은 게로군."
  "벼슬을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 하지도 말라는 스승님의 당부를 왜 잊었겠습니까."
  "가까이 하면 뜨거워 화상을 입겠지만 자네는 지금 너무 멀리하고 있어. 그래서 춥냐고 물은 거지. 하하하."
  "선생님이나 저나 벼슬하고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멀리할 것도 없고 가까이 할 것도 없지요."
  "자네는 이 산중에 들어와서 도인이 돼버린 것 같군. 권력도, 사랑도, 우정도 불가근불가원이 좋지. 그것이 바로 중용일세."
  양팽손은 스승과 함께 산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느릿느릿 뒤따라오는 소가 음매음매 하고 소리치더니 여린 풀을 한 움큼 뜯어 맛있게 삼켰다. 두 사람이 쌍봉사로 가고 있는 산길은 매정마을 쪽이 아니라 금능을 지나치는 지름길이었다.
  "동지들은 지금 모두 와 있는가."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한 동지도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도 아시는 눌재(박상의 호)와 신재(최산두의 호)가 와 있습니다."
  "눌재는 감정이 풍부해서 눈물이 많아. 무엇보다 사심이 없는 게 장점이지."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을 하늘 같은 선비입니다."
  "신재는 사막에 가둬놓아도 살아날 사람이고."
  "곤궁한 집안에서 자라선지 잡초 같은 근성이 대단합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정암의 초상화는 다 그렸는가."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장흥에 유배 와 있는 신잠(申潛)에게도 며칠 전에 두루마리로 가져가 보여준 바 만족해했습니다."
  "신잠이라면 겉치레로 말할 사람이 아니니 믿을 만해. 그 사람의 패기는 알아줄 만하지 않은가."
  양팽손보다 3살 아래인 신잠은 고향이 나주인 신숙주의 증손으로, 부친은 병조, 예조, 이조참판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신종호(申從濩)였다. 신잠은 시서화에 두루 능해 삼절(三絶)로 불렸는데, 서예에는 초서와 예서에, 화목에선 난초와 대나무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선비였다.
  
송흠은 쌍봉사가 세조의 원찰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조의 위패가 어느 전각에 모셔져 있는가."
  "호성각(濩聖閣)입니다. 하오나 세조가 어찌 성인일 것입니까. 동지들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하여 인정하지 아니하고 호성각 앞에서 침을 퉤 뱉거나 그냥 지나쳐버릴 뿐입니다."
  "그래, 자네들 주장이 맞아. 일리가 있어. 왕위를 찬탈한 무도한 분 아닌가. 하지만 세조는 세종의 업적을 흩뜨리지 않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임금일세. 전조의 살림을 허물지 않고 지키는 것만도 업적이라는 말이네. 과오도 분명하지만 공도 또한 분명하니 나는 분향하고 참배할 것이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러한 견해 차이 때문에 젊은 사림들이 송흠을 꺼려했다. 그러나 양팽손은 젊은 사림 중에서 스승의 가르침에 영향 받은바 컸으므로 유일하게 송흠을 따르고 지지했다. 그러다 보니 양팽손은 어느 새 권력을 독약 같이 여기어 멀리하는 송흠을 닮아 있었다.
  "저도 오늘은 호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겠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갑자기 그러면 눌재나 신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야. 그러니 그들이 떠난 뒤 세조 위패 전에 차라도 한 잔 올리게나."
  "스승님의 뜻을 헤아려 그리하겠습니다."

 

박상과 최산두는 송흠이 왔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다렸다. 박상이 물었다.
  "동부승지 어른은 어디 계신가."
  "호성전에 계십니다."
  "학포, 자네 스승은 여전히 보수적이네 그려."
  "눌재 선배님, 무슨 말씀인지요."
  "과거 역사를 늘 긍정하시는 분이란 말일세."
  "맞습니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하여 판을 뒤엎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나간 모든 것을 푹 썩히어 밑거름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부정해야 될 것은 부정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보를 이룰 수 있겠나. 개혁이란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정하고 반성하는 데서 시작하는 정치가 아닌가."
  "스승님은 사람이 세월보다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순리를 역행하지 말라는 뜻으로 과거를 긍정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산두가 나서 중재를 했다.
  "눌재 형님, 동부승지 어른이 오늘은 좌장입니다. 그러니 좌장의 인품이나 신념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후배들의 예의가 아닐 것 같습니다. 먼 길을 오셨으니 반갑게 맞이하십시다."
  박상은 마뜩한 얼굴을 하며 최산두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양팽손도 박상의 시비가 터무니없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스승인 송흠의 언행은 너무 원칙적이었으므로 신뢰감은 주지만 답답한 데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쌍봉사 주변에 차나무들이 산재한 것은 창건주 철감 도윤(道允) 선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차씨를 가져와 퍼뜨린 데서 연유했다. 철감 도윤선사는 '평상심이 도(道)'라고 외친 중국 안휘성의 남전선사 회상(會上)에서 조주와 법형제(法兄弟)가 되어 함께 수행 정진한 유학승이었던 것이다.
  쌍봉사는 남전과 조주가 무심히 차 한 잔 마시며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라고 하던 중국의 다맥을 잇고 있는 다사(茶寺)이기도 했다. 남전은 열반하기 전에 철감 도윤에게 '우리 종(宗)이 너로 인하여 동국으로 몽땅 돌아가는구나' 하고 전등(傳燈)을 인가했던 것이다.))

 

쌍봉사 동암은 일찍이 혜공의 도반이 머물렀으나 그가 떠난 뒤 오랫동안 비어 있었으므로 폐사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동암이 다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은 양팽손이 조광조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머물게 되면서부터였다. 양팽손은 월곡마을 본가의 노비를 불러 암자 주변의 잡초를 뽑고 썩은 사립문을 바꾸는 등 도량을 말끔하게 정비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양팽손을 동암의 암주(庵主)라 불러도 무방했다.
  양팽손은 능주로 낙향한 뒤부터 차를 즐겨 마시곤 하여 동암의 서화실에도 차도구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쌍봉사 입구 연못에서 보았던 연(蓮)과 지초(芝草), 그리고 자신이 아끼는 다관(茶罐)을 소재 삼아 연지도(蓮芝圖)를 틈나는 대로 그렸는데, 암자 방 벽에도 연지도가 한 점 붙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방 한쪽에는 연지도는 물론이고 산수도와 묵죽도의 습작들이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다회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방 안쪽에 앉은 혜공이 팽주(烹主)가 되어 차 마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팽주란 다회를 이끌며 달인 차를 보시하는 사람을 말했다.


  

도원서원은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선생을 수좌(首座)로 석천(石川) 임억령과 한강(寒岡) 정구, 우산(牛山) 안방준 등 사현(四賢)을 배향(配享)한 사액서원으로 동복면 연월리 마을 뒤에 있습니다. ⓒ프레시안


  "그러면 내일 사시에 하도록 합시다. 이 늙은이에게 한 마디 더 하라고 한다면 정암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소. 정암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오. 정암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오늘 우리들이 쌍봉사에 모인 것은 정암이 죽어서 모인 것이 아니라 정암이 우리를 불러서 온 것이오. 그러니 정암은 부활한 것이오. 도학의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그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유림(儒林)의 역사는 정암을 잊지 않을 것이오. 잊지 않고 내내 고마워할 것이오."
  송흠이 낮은 목소리로 비통하게 말을 맺자, 최산두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동부승지 어른 말씀이 옳습니다. 능주향교, 동복향교 교생들에게 이제 정암은 사사 당하기 전의 정암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오."
  "정암은 개혁을 했던 단순한 정치가가 아니라 이제 도학의 군자입니다."
  "그건 평소에 정암이 바라던 바가 아닌가요."
  "동부승지 어른, 그렇습니다. 정암은 행복한 선비입니다. 살아남은 저희가 오히려 불행할 뿐입니다."
  최산두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전라도의 향교 교생들은 생전의 조광조에 대해서 중종의 신임을 이용하여 측근만 중용한다는 불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살신성인한 군자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조광조는 남곤, 심정 등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오히려 유가(儒家)의 의리를 실천한 도학의 사표가 된 셈이었다.
  박상도 한 마디 거들었다.
  "광주에서 정암은 공맹보다 더 높이 올라 있습니다. 무등산이 빛을 잃을 정도입니다."
  "능주에서도 정암의 추모 열기는 더해가고 있습니다."
  양팽손의 말끝에 송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아남은 우리 모두는 정암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우리가 수십 년에 걸쳐 할 일을 정암이 이룩해 냈으니까요. 정암은 호남 사림들의 마음에도 도학의 불을 붙인 군자입니다. 두고 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호남에도 도학이 융성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정암이 능주에 와서 도학의 씨를 뿌렸기에 그렇습니다. 호남 사림들은 정암을 그렇게 기억할 것입니다."

 

 혜공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목숨을 잃은, '차의 아버지' 즉 다부(茶父)라고 일컬어지던 도학자 이목(李穆)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던 것이다.
  "한재와 소승은 동향(同鄕)입니다."
  "김포가 고향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고향이 같을 뿐만 아니라 한재가 유배 간 공주에서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소승은 계룡산 갑사에 머물고 있었으니까요."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한 이목이 24세가 되어 사신 일행으로 중국 연경을 다녀와서 정적의 모함을 받아 25세 때 공주로 유배를 갔던 것이다. 이목이 차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연경에서 육우의 〈다경(茶經)〉과 노동의 〈칠완다가(七椀茶歌)〉를 접하고 난 후였다.
  유배 살이 중에 이목은 차를 찬양한 〈다부(茶賦)〉를 지었는데, 그때 계룡산 갑사에 머물던 혜공은 〈다부〉를 빌려 읽고 어찌나 공감하였던지 밤새 외워버렸을 정도였다. 박상이나 최산두, 송흠 등은 이목이 〈다부〉를 지어 남겼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다부〉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모르고 있었다. 송흠이 궁금했었던 듯 물었다.
  "한재는 나보다 몇 년 후배지요. 그가 왜 〈다부〉를 지었는지 알고 싶소."
  "소승이 기억하기로는, 〈다부〉에도 저술 동기를 밝히고 있습니다만."
  "한재는 무엇이라 하고 있소."
  "〈다부〉에 보입니다만 우리나라에 일찍이 '차를 칭송한 글이 없음은 현인(賢人)을 버려둠과 같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저술 동기인 것 같습니다."
  '차가 현인이라….'
  송흠이 중얼거리자 양팽손이 혜공의 편에서 말했다.
  "다맥(茶脈)은 도학의 맥과 상통합니다. 조선 땅에 도학의 씨를 뿌린 고려 말의 삼은(三隱)을 비롯하여 점필재(김종직의 호) 선생까지 차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차는 현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혜공이 양팽손의 말이 끝나자, 조금 전에 들려준 차 얘기를 마저 했다.
  "한재는 〈다부〉에서 말합니다. 차에 삼품(三品)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삼품이라 합니까."
  혜공의 얘기에 송흠만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박상과 최산두도 차를 미시며 귀를 기울였다.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상품(上品)이고, 지병을 없애주는 것이 중품(中品)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민을 달래주는 것을 차품(次品)이라고 부릅니다."
  "차야말로 현인이자 명의로구려."
  "소승이 생각하기로도 차를 일러 하늘이 내린 명의라고 할만 합니다."
  최산두가 물었다.
  "차에도 공효(功效)가 있습니까."
  "역시 한재 선생은 차에 다섯 가지 공효가 있다고 합니다."
  

 
  쌍봉사 요사채로 들어가는 예쁜문. ⓒ프레시안

"듣고 싶소."
  "첫째는 목마른 갈증을 풀어주고, 둘째 마른 창자와 가슴의 울적함을 풀어주고, 셋째 주인과 손님의 정을 서로 즐기게 하고, 넷째 뱃속을 해독하여 소화가 잘 되게 하고, 다섯째 술을 깨게 해준다고 합니다."
  최산두가 놀라며 말했다.
  "차야말로 유배 온 나와 벗할 만한 동지구려. 건강을 돌봐 주고 주인과 손님의 정을 도탑게 해주니 동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박상도 한 마디 물었다.
  "대사님, 차에 덕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오."
  "물론입니다. 차에는 여섯 가지 덕성이 있습니다."
  "어서 말해 보시오."
  "사람으로 하여금, 첫째 오래 살게 하고, 둘째 병을 그치게 하고, 셋째 기를 맑게 하고, 넷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다섯째 신령스럽게 하고, 여섯째 예의를 알게 하지요."
  "예의를 알게 한다…. 그래서 차가 도학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는군요. 학포, 내 말이 맞습니까."
  "눌재 선배님, 그렇습니다."
  과연 혜공은 이목이 지은 〈다부〉를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다. 혜공은 여인을 불러 다관에 달인 차를 다시 담아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해박한 지식에 눌려 아무도 물어오지 않자, 연배가 비슷한 송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으리, 제가 좋아하는 〈다부〉의 한 구절을 염불해도 되겠습니까."
  "좋구요, 말구요."
  혜공은 찻잔 대신에 목탁을 들고 불경을 외우듯 〈다부〉의 한 구절을 자신의 소리에 도취한 듯 느리게 염송했다.
  
  한 잔을 마시니 메마른 창자가 눈 녹인 물로 씻어낸 듯 깨끗이 씻겨 내리고
  두 잔을 마시니 마음과 혼이 상쾌하여 신선이 된 듯하고
  석 잔을 마시니 병골에서 깨어나 두통이 없어지며 호연지기가 생겨나고
  넉 잔을 마시니 가슴에 웅혼한 기운이 생기며 근심과 울분이 사라지며
  다섯 잔을 마시니 색마가 도망가고 탐욕이 사라지며
  여섯 잔을 마시니 세상의 모든 것이 거적때기에 불과하며 해와 달이 방촌에 들어 신기함이 하늘나라에 오르는 듯하고
  일곱 잔은 채 반도 마시기 전에 맑은 기운이 울울이 옷깃에 일어나네.
  
  중국의 노동이 지은 〈칠완다가〉를 빌려와 이목이 지은 차노래였다.

 

...........

 

"내 얘기를 정암에게 들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려."
"그렇습니다. 용인에서의 일입니다. 그때 나으리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암을 용인에서 만났단 말이오."
"정암 대감님을 처음 뵌 곳은 평안도 희천 땅이었으나 그때의 저는 입이 있어도 벙어리나 다름 없었고 눈이 있어 보아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정암 대감님을 실제로 뵌 곳은 용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암과 그런 인연이 있었다니 세상이 좁구려. 처자의 이름은 무엇이오."
"한훤당(김굉필의 호) 어른께서 지어주셨습니다만."
"한훤당이라면.... 정암의 스승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양팽손은 한훤당이란 말에 동암으로 갈 생각을 접었다. 마침 비가 갠 동암 쪽의 하늘에 달이 뜨고 있었으므로 해탈문 앞의 연못가를 산책하기에 그만이었다.
"그때의 일이 궁금해지는구려."
"귀 담아 들으실 만한 얘기는 아니옵니다만."
"정암을 희천 땅에서 보았다 하고 한훤당 어른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소."
양팽손이 강하게 요구하자, 여인은 할 수 없이 지난 얘기를 이슬비 내리듯 가만가만 털어놓았다.

▲ 철감선사탑 올라가는 길. ⓒ프레시안

"저의 고향은 평안도 희천(熙川)입니다. 저의 이름은 원래는 없었으나 한훤당 어른께서 희천 땅으로 유배를 오시어 저를 수양딸로 삼고 초설(初雪)이란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김굉필이 서설(瑞雪)이라고 지었다가 여인의 아비에게 초설로 하자고 고쳤다는데, 여인의 아비가 "나으리, 서설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서설을 고집했지만 김굉필은 "첫눈이 와서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겠지 하고 무심코 서설이라고 지은 이름이니 거둬들이겠네. 한 사람의 이름을 내 기분대로 지을 수야 없지. 그러니 초설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어. 첫눈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지조를 지키며 세상을 살아가라는 내 당부가 담긴 것이니 초설이라고 하게나." 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역에서 참리(站吏)로 일하던 여인의 아비가 희천의 김굉필을 자주 찾아갔던 것은 희천 부근에 있는 장동(長洞)역의 조원강(趙元綱) 찰방이 수시로 심부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조원강은 아들인 조광조를 김굉필에게 맡겨 공부시키기 위해 참리 편에 곡물이나 조정에 진상하고 남은 꿩이나 약초를 보내곤 했고, 참리 또한 영특한 장녀를 김굉필에게 보내어 글이라도 깨치게 하고 싶어 하던 중 마침 김굉필이 시중 들 동자를 구하고 있었으므로 자기 딸을 소개했던 것이다.
그때 초설의 나이는 15세였고, 조광조는 17세였다. 초설은 철없이 조광조 등과 함께 공부하기를 원했으나 김굉필은 '7세가 되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자리를 같이 하지 않게 하며, 또 함께 먹지 않게 한다(七年不同席不共食)'라고 말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설은 강의가 없는 날 아주 잠깐 불려가 <소학>을 배우거나 귀동냥으로 한문을 조금씩 깨쳤다.
제자들이 모여 강의를 듣는 날에는 적소(謫所)의 방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김굉필이 제자들이 와 있을 때는 적소를 벗어나 있으라고 엄명을 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빗자루를 들고 있거나 호미로 풀을 뽑는 초설을 청소하는 관노쯤으로 알고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초설 또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김굉필이 희천에서 순천으로 이배되기까지 2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초설은 김굉필의 제자들을 대부분 알지 못했다.
다만, 단 한 사람 조광조만은 예외였다. 그날 조광조가 초설이 저지른 실수를 스승인 김굉필 앞에서 감싸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김굉필은 또 다시 조원강이 보내준 꿩 한 마리를 놓고 매우 들떠 있었다. 조원강은 김굉필의 건강을 염려하여 보냈건만 김굉필의 생각은 다른 데 있었다. 마침 강의가 없는 날이어서 초설은 적거 안팎을 쓸고 닦고 있는 중이었다.
 
  김굉필은 마당가로 나와 조원강이 보내준 꿩을 잡아 털을 뽑고 내장을 꺼내며 물었다.
"초설아, 꿩이 우리 몸에 어디에 좋은지 말해 보아라."
"이곳 희천에서는 아낙이 출산 후에 허리나 배가 아플 때 먹사옵니다."
"옛 문헌을 보면 간을 좋게 하여 눈을 밝게 하고, 설사를 멎게 하는가 하면 치질이나 종기를 없앤다고 나와 있다. 허나 내가 오늘 꿩을 받고 좋아하는 것은 그보다 다른 까닭이 있어서이다."
"나으리, 꿩이 우리 몸 어디에 좋습니까."
"기침이나 목감기에 특효가 있느니라."
"누가 감기에 걸린 분이 있사옵니까."
김굉필은 칼질한 꿩을 우물물에 정성스럽게 씻은 후 말했다.
"서울에 어머니가 계시느니라. 당신께서 기침이 심해졌다는 소식을 엊그제 들었는데 마침 오늘 꿩을 선물 받았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느냐."
김굉필이 어느 날보다 들떠 있는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다는 기쁨이 컸기 때문이었다. 도학의 대학자라고 명성을 날리는 김굉필도 어머니 앞에서는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어린 아이가 되고 마는 이치였다. 초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
"나으리, <소학>에 나오는 효(孝)란 말이 생각나옵니다."
"어디 한번 외워 보거라."
초설은 마루를 닦던 걸레를 놓고 바른 자세로 서서 외웠다.
-<예기(禮記)>에, 효자로서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온화한 기운이 있고, 온화한 기운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즐거워하는 빛이 있으며, 즐거워하는 빛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온순한 모습이 있다. 효자는 부모 모시기를 옥(玉)을 잡은 듯하며 가득한 그릇을 받든 듯하여, 정성스럽게 하고 조심조심하여 이기지 못할 것 같이 하고 장차 떨어뜨려 잃을 것 같이 한다.
"나이 30이 될 때까지 사서삼경을 밀쳐두고 오로지 <소학>만 읽은 나를 두고 세상 사람들이 '소학동자'라 불렀거늘 지금 네가 외우는 모습을 보니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구나."
45세에 희천으로 유배 온 김굉필에게 있어서 <소학>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소의경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그에게 이제 겨우 글을 깨친 초설이 <소학>의 한 구절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능숙하게 외우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아비가 장동역 참리라 했지. 그 아비에 그 딸이야."
"과찬이옵니다."
"초설이는 앞으로 무엇을 할 작정이냐."
"중인의 신분인 데다 여자로 태어났으니 무엇을 하겠사옵니까. 다만 한 가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큰 재산을 마련하여 공부하는 선비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꿈이옵니다."
"허허. 기특하도다. 무엇으로 재산을 마련한단 말이냐."
"서울로 들어가는 지역에 여관을 운영하면 재산이 금세 불어날 것 같사옵니다."
"네 뜻이 기특하니 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겠느니라. 역 주변에는 이미 여관이 들어서 있을 터이니 선비들 출입이 잦은 용인 길목 같은 곳이 좋을 것이다."
점심을 한 후에도 김굉필은 초설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식곤증이 왔는지 하품을 하며 말했다.
"햇볕에 이러 저리 잘 말려야 하느니라. 개나 고양이도 조심하고. 알겠느냐."
"나으리, 걱정하지 마셔요."
그런데 초설이도 김굉필이 낮잠을 즐기는 동안 햇볕에 쪼그리고 앉자 졸아버렸다.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을 때는 도둑고양이가 꿩고기를 물고 달아나버린 후였다. 초설이는 당황하여 적소를 한 바퀴 돌고, 또 적소 밖으로 나가 허둥지둥 이 곳 저 곳을 뒤져보았지만 이미 도둑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초설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마당에 엎드린 채 사실대로 고백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으리, 나으리."
"무슨 화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고양이가..."
"고양이가 어쨌다는 것이냐."
"꿩을 물고 달아나버렸사옵니다."
"뭣이라고 했느냐."
마침 제자들도 오후 강론 시간에 때맞춰 돌아와 모두들 놀랐다. 이처럼 김굉필이 화가 나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초설이를 나무라는 김굉필의 모습은 평소와 너무 달랐다.
"내가 뭐라고 일렀더냐. 고양이나 개를 잘 지키라고 하지 않았더냐."
"나으리, 벌을 주셔요."
"무슨 벌을 받고 싶으냐."
"잘못이 크오니 나으리께서 벌하는 대로 달게 받겠사옵니다."
"알았다. 저리 물러가 있거라."
그러나 초설은 물러가지 않고 벌을 받듯 마당에 무릎을 꿇고만 있었다. 김굉필은 적소 밖에 사는 양인들이 몰려와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화를 억눌렀다. 제자들은 분기탱천한 스승의 모습을 보고는 누구 하나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김굉필이 조금이나마 화를 누그러뜨린 듯하자 조광조가 나서서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소자(小子)가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조광조는 두려워서 떨고 있는 초설이와 의아해 하는 김굉필을 번갈아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자가 적이 의혹되는 것이 있어 말씀드리고자 하옵니다."
"어서 말해 보거라."
"스승님께서 부모를 봉양하는 정성은 비록 간절하오나 군자는 말과 기색을 잘 살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하온데....."
조광조는 매우 겸손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조언은 이미 김굉필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이고 있었다. 명분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군자는 고성을 지르거나 붉으락푸르락 안색을 바꿔서는 소인배나 다름없다는 조광조의 주장이었다.
"나도 바로 뉘우쳤는데 네 말이 또한 내 마음과 같으니 부끄럽구나."
김굉필은 조광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초설이를 불러 세웠다.
"초설이는 일어나라. 초설이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나를 되돌아보게 한 공이 크다. 또한 광조는 나를 부끄럽게 했으니 지금 이 순간만은 너희들이 나의 스승이다. 내가 너희들의 스승이 될 수 없느니라."
초설이는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지 못했을 뿐더러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어 자신을 감싸는 듯한 발언을 한 조광조를 감히 바로 볼 수 없었다.
▲ 쌍봉사 당간지주. ⓒ프레시안
'그때 희천 적소에서는 정암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으니 만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이로군.'
양팽손은 초설이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설이 왜 용인으로 갔으며, 조광조를 왜 잊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정암을 잊지 못하여 쌍봉사로 내려온 그대를 이해하겠소."
"용인으로 가서 조광조를 바로 만나보았소."
"그러지 아니하였습니다. 행여 공부에 방해될까 정암 대감님 댁 부근에는 단 한 발짝도 디뎌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 무얼 하고 지냈소."
"부친의 도움을 받아 허름한 민가를 한 채 샀고, 한 달이 지난 뒤 여관을 개업했습니다. 지금도 여관은 번창하여 저 없이도 잘 되고 있습니다. 나으리께서도 용인에 오시면 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연못에도 달이 떠 있었다. 초설은 연못에 뜬 달을 보며 말했다.
"정암 대감님은 저에게 두 가지 은혜를 주신 분입니다. 희천에서는 철없는 저를 감싸주셨고, 용인에서는 저의 마음을 받아 주신 분이십니다."
"대단하시오. 그 인연으로 도학자들을 알게 모르게 후원해 왔다니 말이오."
"나으리, 부끄럽습니다. 제가 한 일은 지나가는 가랑비처럼 미미합니다."
그러나 초설이 용인에서 사림들에게 베푼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여관은 시도 때도 없이 기호지방의 사림 개혁 세력들이 모이는 안가(安家) 구실을 했던 것이다. 첩보와 순발력이 다소 떨어지는 호남 사림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양팽손은 밤공기에 어깨가 축축해지고 차가워짐을 느꼈다. 문득 동암에 스승인 송흠이 혼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팽손은 초설이 해탈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동암으로 올라갔다.

출처 : 광양향토문화연구소
글쓴이 : 빈들에서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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