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성균관에는 훗날 기묘명현으로 추앙받는 김구, 박훈, 기준, 박세희, 윤자임, 양팽손 등의 유생이 있었다.
중종은 지난 가을 11월 19일에 조광조를 능주로, 김 정을 금산으로, 김 구를 개녕으로, 박 세희를 상주로, 박 훈을 성주로, 윤자임을 온양으로, 기준을 아산으로 귀양 보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꿈꾸던 젊은 사림을 풍비박산 내었는데, 그것도 분에 차지 않아 능주로 가 있던 조광조에게 사사의 극형을 내린 일이 있었다. 머잖아 누가 또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필시 간인(奸人)들이--심정과 남곤-- 젊은 사림의 씨를 말리려 함이다.'
김 식이 혼잣말로 외친 간인들이란 심정(沈貞)과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을 두고 한 말이었다. 훗날 세상 사람들 역시 중종을 이용하여 기묘년의 재앙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이라 하여 화매(禍媒)라고 비웃었다.
'지치(至治)란 정녕 꿈이었던 말인가. 왕도정치란 정녕 삼대(三代; 중국의 하, 은, 주의 세 왕조)에만 가능했단 말인가. 사림이 꿈꾸던 도덕정치가 한갓 이상이었단 말인가. 아, 나라의 정통을 새롭게 하려는 일이 이토록 요원하단 말인가.'
나라의 정통을 새롭게 세우는 일이란 왕과 신하가 성리학의 군자가 되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을 말했다. 어깨를 늘어뜨린 김 식의 퀭한 두 눈이 흐려졌다. 아무리 체념하려 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해 추관(推官; 취조하는 관리) 앞에서 꿇어 앉아 자복하기를 '권세를 쓰는 자리에 있지 않았으므로 인물을 발탁하거나 배제하는 일이 전혀 없었으며, 패거리(朋比)를 맺고 반대만 하는 습관으로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을 날로 글러가게 하였다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피를 토하듯 외쳤지만 중종은 오히려 추관들에게 엄하게 다스릴 것을 명했다. 〈대명률〉의 간당조(姦黨條)를 적용한다면 조광조, 김 정, 김 식, 김 구 등은 조정의 공론을 뒤집고 정사를 잘못되게 한 간당이라 하여 모두 목을 베고 처자를 종으로 삼으며 재산을 관에서 몰수하는 죄에 해당되었다. 또한 윤자임, 기준, 박 세희, 박 훈 등은 간당을 추종한 죄로 1등을 감하여 각각 장 1백대에다 유형 3천리에 처해져야 했다.
중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간인들의 손을 들어준 실로 어이없는 비극이었다.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 식 등은 절규에 가까운 옥중상소를 올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두 덜 되고 어리석은 것들이 좋은 때를 만나 경연에 참가하여 전하를 가까이 모셔왔사옵니다. 거룩한 임금만 믿고 어리석은 소견들을 털어놓다가 여러 사람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지만 임금만 알았을 뿐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았나이다. 우리 임금을 요순 같은 임금 같이 되게 하자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겠나이까. 하늘이 내려다보거니와 다른 마음은 아예 없사옵니다.
신 등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지만 사화(士禍)가 한번 시작되면 장차 나라의 운명이 우려되지 않나이까. 대궐문이 가로막혀 품은 생각을 아뢸 길이 없사옵니다. 말도 못하고 영영 하직하자니 차마 못할 일이옵니다. 한번만 전하가 직접 신문하여 준다면 만 번 죽어도 한이 없겠사옵니다. 정은 넘치고 말은 중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겠나이다.〉
돌변한 중종의 마음은 이미 그들을 떠나 있었다. 최측근의 시종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냉혹하게 내칠 수 있다는 것을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중종은 늙은 대신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즐겼다. 겁 많고 나약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천하에 알렸다. 왕이 된 지 실로 14년 만에 자신의 고집대로 왕명을 지시하는 쾌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적셨다.
중종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율을 감추고 겉으로는 노기를 띠었다. 늙은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 등이 울면서 거듭거듭 중종에게 진언했지만 극형만은 면해 주었을 뿐 사림 모두에게 간당이란 누명을 씌우고는 임명장을 모두 빼앗고 장을 쳐서 유배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조광조 등의 죄를 율(律)에 적용하면 과연 사사해야 하겠으나 깊이 생각하고 또 대신의 말을 반복해서 생각하니 사사하면 놀랄 듯하다. 조광조 등 4인은 사형을 감해서 임명장을 다 빼앗고 장 1백대를 쳐서 먼 지방에 귀양 보내며, 윤자임 등 4인은 임명장을 다 빼앗고 장 1백대를 쳐서 속죄시키고 거주제한을 시킬 것이다.'
중종은 거칠게 분노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요순의 임금 같은 천품을 타고 나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은 공자도 아니고 맹자도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중종은 군자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니 하늘의 도(道)를 닦아 지치를 펴서 요순의 임금이 되라고 날마다 밀어붙이는 조광조, 김 식 등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심성이 무르고 자리보전에 시달려 왔던 중종에게는 지치는 고사하고 재위 내내 부실했던 왕권을 지켜내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왕권을 갈망하던 중종에게는 성인군자가 되어 왕도정치를 펴라고 주장하는 조광조, 김 식 등은 떼어버리고 싶은 혹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힘없는 중종이 마음속으로 원했던 것은 왕도가 아닌 왕권이었다.
생진사시에 합격하거나 입학 자격을 취득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면 유생이라 불렀는데, 선발된 200명의 유생들 중에는 음주가무를 좋아하여 삼삼오오 작당하여 한밤중에 성균관 담을 넘어 기방을 기웃거리며 술을 몰래 마시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조부나 부친의 벼슬을 내세워 은근히 과시하며 우쭐거리는 사람도 있고, 배타심이 강하여 고향 사람끼리만 몰려다니며 지방색을 조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사교나 친화력이 부족하여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도 있었다. 전라도 능주에서 올라온 양팽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초라한 옷차림의 양팽손을 보면 퀴퀴한 냄새라도 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저만치서 걸음을 멈추는 유생도 있었다. 헝겊으로 덕지덕지 기운 무명 바지저고리를 사철 내내 입고 다니니 외모만 보면 영락없이 한미한 집안의 시골뜨기 서생이었다. 그러나 깡마른 얼굴에는 강기가 흘러넘쳤고, 퀭한 두 눈에서 뿜어지는 눈빛은 어리어리한 유생들을 압도했으며 눈썰미가 남달라 그림을 잘 그렸다.
시골뜨기 양팽손이 전라도 관찰사이자 청백리로 향리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송흠(宋欽)의 제자라는 것을 안 사람은 조광조뿐이었다. 성균관 입학 전에 6살이나 어린 양팽손이 물어물어 용인에 살던 조광조의 초당을 찾아가 패기 있게 도학을 논하며 며칠 동안 초당 사랑채에서 기숙했던 적이 있고, 더구나 두 사람은 같은 해 양팽손은 생원시 1등으로, 조광조는 진사시 1등으로 합격했던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능주목사골의 옛사진으로 1913년 사진이다. ⓒ프레시안 |
'효직(孝直; 조광조의 자)은 아직도 용인 선산(先山)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능주 쌍봉사 동쪽 계곡의 동토에 묻혀 있다지. 억울하고 통분할 일이로다.'
도학이란 유학의 관념이나 문장에 빠지지 않고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말했다. 도학의 목적은 한마디로 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의 도학 정맥은 여말선초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길재로부터 발원하여 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쌍봉사 가는 길은 동북쪽 골짜기로 나 있고, 구례마을을 지나 예재를 넘어가는 보성 길은 동남쪽 골짜기로 나 있었다. 중조산(현 계당산)은 능주와 보성을 경계 짓는 큰 산으로 많은 산자락과 골짜기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허공의 빗방울이 증조산 정상에서 바람에 휩쓸려 보성 쪽으로 떨어지면 보성강물에 섞였다가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능주 쪽으로 떨어지면 지석천을 거쳐 영산강으로 합류했다.
논밭을 불문하고 고인돌이 널려 있는 것은 능주 땅의 특징이었다.
'정암 어른이 돌봐주실 것이야.'
여인은 쌍봉사에 가면 조광조의 혼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여인은 능주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주막 술청어멈에게 조광조의 시신이 쌍봉사 동편 은밀한 곳에 묻혀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술청어멈의 얘기는 능주 고을 사람들이 모두 쉬쉬하면서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작년 초가을에 서울에서 낙향한 양팽손이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 염한 뒤 능주 땅에서 가장 오지인,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쌍봉사에서도 오리쯤 더 들어가는 증조산의 그윽한 산자락에 묻어주었던 것이다. 그곳은 약초꾼 대엿 명이 화전을 일구고 사는 산촌이므로 조광조의 시신이 훼손당할 염려가 없는 산자락이었다.
패기에 찬 32세의 양팽손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극형을 받은 죄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를 갖추어 염하고 장사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능주 현감과 아전들이 묵인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능주 출신의 선비 양팽손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젊은 양팽손은 능주 백성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능주 출신으로서 생원시 1등 합격에다 문과에 급제한 선비는 양팽손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양팽손은 소싯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7세 때 현감이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그해 가을 전라도 감사(종2품, 관찰사의 별칭)가 고을을 순회하면서 소년 양팽손을 불러 천지일월(天地日月)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하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천지는 나의 도량이 되고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된다.
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
이에 감사가 크게 칭찬하며 '해학(諧謔)의 모습이요, 추월(秋月)의 정기(精氣)라 훗날 용문(龍門)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크게 떨치리라'라고 격려문을 써주었던 것인데, 그 뒤 소년 양팽손은 양신동(梁神童)으로 불렸다.
지금은 비록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낙향한 양팽손이지만 한때는 경연에 나아가 중종과 국사를 논하던 대간으로서 사간원 정언(정6품)과 사헌부 지평(정5품)을 지냈으니 외직의 현감(종6품)이나 미관말직의 아전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여인(정암의 후실?)을 맞이한 스님은 쌍봉사 주지 혜공(惠空)이었다. 삭발한 지 오래 된 듯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50대의 나이로 보였다. 웅얼거리는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는 60대의 노승으로 느껴지게도 했다.
"자, 보살이 머물 방을 정해 주겠소. 저 동암에는 학포 선생이 와 계시고, 저 백운암이나 백련암에는 머잖아 귀한 손님들이 올 것이라 하여 비워 두고 있소. 그러니 보살은 소승이 기거하는 주지실 옆 골방밖에 잘 자리가 없구려."
"대사님, 고맙습니다."
혜공의 말대로라면 귀한 손님들이 쌍봉사에 모여들 모양이었다. 도량이 말끔하게 청소된 것을 보면 쌍봉사에서 무슨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절이란 부처님이 계신 다장(茶莊) 같은 곳이오. 그러니 누구나 차를 마시고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겠소."
"절에는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신지요."
"소승이 혼자 절을 지킨 지 오래 됐소이다."
"이렇게 큰절에 혼자 계신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노승은 돌아서며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럴 만한 사연이 있지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곳 쌍봉사는 세조의 원찰이거니와 임금님의 지시가 내려와 방백(方伯)의 보호를 받고 있소이다."
혜공은 능주까지 불어 닥친, 향교 교생들의 불상을 파괴하는 훼불과 승려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법란(法亂)에 고개를 저었다. 지방향교가 위세를 부리면서 불교를 핍박하는 배불이 공공연하게 자행돼 왔던 것이다. 절을 태우고 승려를 몰아내면 저절로 공맹(孔孟)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향교의 교생들이 촌민들을 선동하곤 했다. 공자를 맹신하는 항교 교생들의 만행이었다.
실제로 세종 때 능주에서 향교 교생들이 재암(齋庵) 11곳을 불태워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현령의 허가를 받아 재암을 불태워버린 사건으로 숭유(崇儒)를 표방하면서도 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허가한 세종에게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놀란 세종은 군정의 급한 일이 아닌데도 사건의 초기 진화를 시도했다. 자신이 궐 안에 내불당을 허락하자 능주의 백성들이 지방민으로서 가장 먼저 반발하고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삼경의 늦은 시각인데도 의금부의 부진무(副鎭撫) 강맹경(姜孟卿)을 화급하게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전라도 능성현의 교생 양회 등이 재암 11곳을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이 무슨 변괴인가. 그대는 가서 국문하고 낱낱이 과인에게 보고하라."
강맹경은 바로 말을 타고 능주로 달려가 조사한 뒤 세종에게 자세하게 아뢰었다.
"신 감사가 사헌부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역승(驛丞) 서구성(徐九成)으로 하여금 도내를 다니면서 재암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게 하였는데, 구성이 능성에 이르러 향교 생도 양회(梁淮) 등의 공초를 가지고 말하기를 '만일 새로 지은 것이 있는데도 고하지 아니하면 죄를 받아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니, 회 등이 평소 고을에 재암이 많은 것을 분하게 여겼으므로, 이에 현령 최추(崔湫)에게 고하여 불살라 없애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해 주니 회가 무리를 이끌고 재암 11곳을 불살라 버렸는데 모두 새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추와 회 등의 저지른 죄가 가볍지 아니하므로 이미 주현(州縣)에 나누어 가두게 하였사옵니다."
강맹경은 새로 지은 불법 재암은 태워버려도 죄가 되지 않은데, 이미 지어진 재암을 태워버렸으므로 죄가 가볍지 않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능주의 현령과 항교 교생 양회 등이 하옥은 됐으나 그들은 양심범 같은 대접을 받았고 그런 분위기는 중종의 기묘년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혜공의 은사 도반이 탁발을 나갔다가 마을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개죽음을 당한 사건도 있었고, 화적으로 위장한 향교 교생들이 쌍봉사에 들이닥쳐 협박을 일삼으니 승려들이 송광사나 화엄사 등 안전한 절로 떠나거나 환속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니 자연 쌍봉사도 폐사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세조의 원찰이라는 명분과 혜공이 스스로 닦은 법력으로 절을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양팽손이 12세 때 쌍봉사에서 사서삼경을 독학하였다.
"천도재라…. 망자를 위해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지요. 마침 학포 선생이 조 대감의 영정을 그리고 있고, 소승이 초가 사당을 짓는 데 울력했으니 잘 되었소이다. 보살이 기도하는 것도 조 대감을 추복(追福)하는 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 되겠구려."
혜공은 그제야 여인의 정체를 이해했다. 여인은 조광조를 사모하여 수절하고 있는 아낙이 틀림없었다. 올린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남자에게 마음을 바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인에게 한 남자란 두말할 것도 없이 조광조일 터였다.
여인은 금비녀를 쌍봉사에 시주하고 재를 지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팽손은 여인을 바라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양팽손이 동암에 한 달째 머무르고 있는 까닭은 조광조의 영정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혜공이 목수를 데리고 지은 초가사당에 안치할 조광조의 영정이었다. 며칠 후면 조광조와 인연 있는 호남의 선비들이 초가사당에 모여들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양팽손은 이미 사간원 정언으로 근무할 때부터 차를 음다했던 적이 있다. 감찰 업무를 보기 전에 반드시 차를 마시며 다례(茶禮)를 했는데, 차 마시는 그 시간을 대간들은 다시(茶時)라고 불렀다. 차는 각성의 효과가 있어 흐린 정신을 맑게 해주고 피로를 덜어주는 효과가 있으므로 무엇이건 시비를 가려야 하는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들은 다시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세상도 추웠지만 지난겨울 날씨도 혹독했습니다. 찻잎이 동해를 입어 죽었다 살아나오니 이제야 차를 만들 만한 싹이 나오지 뭡니까. 수확한 양은 금싸라기처럼 소량이지만 맛과 향은 여느 때와 비교할 바 아닙니다. 여기에도 자연의 섭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양팽손도 혜공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다신(茶神)이 내린 듯한 차입니다. 차향을 맡아보니 천도(天道)를 알겠습니다. 겨울이 혹독했던 것은 봄이 가까워진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늘은 차를 통해서, 계절을 통해서 도(道)를 말하고 있소이다."
"학포 선생께서는 서화잠심(書畵潛心)의 경지에서 노니신 줄만 알았더니 다인(茶人)의 경지를 즐기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서화잠심이란 현실에서 물러나 글과 그림으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말했다. 양팽손은 낙향하여 서화로 잠심하며 세상을 잊곤 하였는데, 조광조의 영정을 그리는 작업도 그러한 일과의 연장인 것이었다.
적벽은 신재 최산두 선생이 유배왔던 인근에 있었는데 신재 최산두 선생이 중국의 적벽보다 뛰어나다며 적벽이라 명명했다. 현재는 동복호에 많이 잠겼지만 그 수려한 모습은 여전하다. ⓒ프레시안 | |
최산두(崔山斗)--조광조와 한 날 한 시에 서울을 떠나 조광조는 능주로 와 한 달 후 사사 당했고, 그는 동복 나복산(蘿葍山)의 한 민가에서 호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짓고 지금까지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최산두가 없었더라면 공물인 매를 제 때에 바치지 못하고 빚에 쪼들려 결국에는 유랑민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매잡이 농부가 자청해서 최산두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최산두가 중종에게 진언하여 매가 드문 남방에서 매를 잡아 진상하는 관행을 혁파했기 때문에 남방의 매잡이들이 매를 잡지 못하여 매 한 마리 대신에 베 40-50필을 바치던 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산두는 중종 12년 8월 24일 조강(朝講)에 나아가 인천 출신인 시강관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매의 진상 폐단에 대해서 아뢰었던 적이 있었다.
검토관으로 조강(朝講; 아침강론)에 참여한 최산두가 먼저 아뢰었다.
"매는 본래 남쪽지방에서 나는 것이 아니어서 한 마리의 값이 베로 거의 40-50필이나 되는데도 각 고을에서 감사에게 올리면 감사는 받아서 나라에 진상하고 나머지는 선물로 각처에 나누어주면서 하찮은 물건처럼 여기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백성들이 당하는 폐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양계(兩界; 동북계와 서북계)에서 토산물을 바치는 규례에 따라 남쪽지방에 다같이 바치도록 요구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것 같사옵니다."
중종은 뜻밖에도 최산두의 진언을 조금 받아들였다.
"매를 진상하는 것은 햇것을 올리는 제사에 산 꿩을 바치는 것과 같은 일이니 없앨 수는 없다. 양계는 토산지이지만 남방은 산지가 아니니, 굳이 봉진(封進)하게 하면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칠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최산두와 조강 전에 응방을 없애자고 입을 맞춘 이성동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매를 진상하는 것의 폐단에 대해서는 시종관과 대간들이 이미 자세히 논계하였으며, 남방은 토산지가 아니니 폐지해야 하옵니다. 함경도의 가을철매(秋鷹)와 사냥매 소응(巢鷹)을 잡아 바치는 폐해도 많사옵니다. 매사냥하는 사람이 진상이라는 핑계로 여염에 드나들며 닭이나 개를 때려잡아도 힘없는 백성은 막지 못하여 뒤숭숭하옵니다. 매를 바친 뒤에는 그 나머지가 재상과 시종에게 내려지기도 하니, 폐단은 지극히 크나 쓰임은 지극히 가볍사옵니다. 응방을 둔 것이 놀이 도구에 가까우니 폐지한들 무엇이 해롭겠사옵니까."
중종은 응방의 폐지만은 허락지 아니하였다.
"응방을 둔 것은 놀이 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햇것을 올리는 제사를 위하여 둔 것이므로 부득이한 일이니 폐지할 것이 없다."
응방(鷹房).
매를 사육하고 잡는 일종의 관청인데, 연산군 때 그 폐단이 절정에 달하였다. 연산군은 응방에 서울을 수비하는 갑병(甲兵)과 군역에 복무하는 장정인 정병(正兵)을 각각 400명을 두었고, 이것도 부족하여 내금위에서 70명, 사복(司僕) 10명을 대기시켜 놓고 매를 잡게 하였다. 이들이 민가에 끼치는 민폐는 가을 논을 뒤덮은 메뚜기 떼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으므로 중종 때에 이르러 최산두 등이 응방을 폐지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응방의 혁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남방에서 매를 진상하는 일만 중지시키는 데 그쳤다.
그래도 최산두의 공은 남방의 지방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그는 유배를 와서 뜻밖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반듯한 삼 칸 초가를 제공받았고, 능주와 이웃한 동복의 향교 교생들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자주 찾아주어 외롭지 않았다. 최산두가 유배 중에도 쌍봉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과 호의가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망향정은 그 적벽을 바라보고 있는 정자이다. 최근에 물에 잠긴 마을 주민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프레시안 | |
"동복에서 온 최산두라고 합니다."
"존함을 익히 들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최산두는 조광조보다 1살 아래의 나이였고, 광양의 둔전(屯田)을 일구는 가문에서 태어나 김종직, 김굉필을 사숙했고 15세 때 〈통감강목(通鑑綱目)〉 80권을 2년 동안 독파한 후 18세 때 상경하여 조광조, 김정, 김안국 등과 교유하며 '낙중군자(洛中君子)'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혜공이 위로의 말을 먼저 건넸다.
"적소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먼저 찾아가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을 받은 자는 적소에 있어야 하고, 스님은 법당에 있어야지요. 그게 법도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는 법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오늘처럼 예외는 있는 법이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불가에서는 지킬 예도 없고 만들어진 법도도 없다고 봅니다. 그것에 얽매이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고자 함이지요. 그래서 공(空)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혜공이 던지는 말에 최산두는 오랜 만에 고승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없다기보다는 무상하고 허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허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입니다. 본래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불도들은 불성(佛性)이라고도 합니다. 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소승은 수행하고 있습니다. 불성을 깨치어 행동하고 말하면 그것을 우리 빈도(貧道)들은 해탈이라고도 하고 성불이라고도 합니다."
최산두는 논박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가볍게 응수하고 말았다.
"석가는 공자와 노자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소승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승이 알 수 있게끔 가르침을 줄 수 없겠습니까."
"공자는 수신하여 세상에 나아가 지치를 펴는 데 도(道)가 있다 하고, 노장(老壯)은 자연으로 돌아가 세상을 잊어버리는 데 도가 있다 하고, 석가는 자연 속에서 수행은 하되 세상의 일을 외면하지 않는 데 도가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혜공이 합장을 하며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최산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문대로 기묘명현의 반열에 오른 선비답게 최산두는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15세 때 〈통감강목〉 80권을 들고 석굴로 들어가 수천 번을 읽고 나왔을 때 주변의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는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혜공은 합장한 채 소리 나지 않게 중얼거렸다.
'임금님에게 〈성리대전〉을 강할 26인의 선비 중에서 최 공이 첫 번째로 뽑혔다는데 과연 사실이군 그래.'
......
"차는 술과 달라서 따르는 순서가 없을 듯싶사옵니다."
최산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강호에 고수가 따로 없소이다. 보살이 바로 고수입니다."
혜공도 맞장구를 쳤다.
"최 공의 도학이나 소승의 불도보다 높은 것이 다도인가 봅니다."
물염정은 적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정자이다. 신재 최산두 선생이 동복에 유배를 오자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신재 선생에게서 수학하고자 찾아든다. 이때 꼭 이 물염정을 거쳐 가야했는데 그래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는 곳이었고 현재도 많은 시액이 걸려있다. 특히 이곳은 장성사람 하서 김인후가 신재선생을 뵈러 갈때 꼭 들른 곳이다. ⓒ프레시안 | |
혜공은 최산두에게서 귀양살이의 고독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물었다.
"최 공께서는 적거(謫居)의 생활이 심히 외롭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술을 구해 실컷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제가 태어난 광양의 백운산과 바다의 풍경만 수려한 줄 알았는데, 동복의 숨은 비경도 한 폭의 수묵화입니다. 말로만 듣던 중국의 적벽 진경(眞景)이 바로 동복에도 있소이다. 적소를 드나드는 제자들에게 동복천의 병풍바위를 앞으로는 적벽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조물주가 이 세상에 내려준 작품이라 할 만한 적벽이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복에도 있습니다.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최산두는 적거 생활이 고독하기는커녕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양팽손이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교생들에게 '지금 아는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을 걱정하며 물리치는 데 반해서 그는 제자들도 활발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민심도 따뜻하고 향학의 열망도 대단합니다. 전하께서 동복으로 보내주신 성은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해배가 된다 해도 동복을 떠나지 않고 적벽 노루목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
기묘사림 중에서 최산두는 분명 특이한 인물이었다.
김식은 기회를 기다리려고 도망치다 자살하였고,
양팽손이나 유성춘, 윤구 등은 세상을 벗어나 산촌에서 잠심(潛心)하고 있고,
박상(朴祥) 등은 분함을 억누르지 못해 화병이 날 지경인데,
최산두는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유배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혜공은 최산두의 얘기를 들으면서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시절에도 인연이 있으니 시절을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사람이 시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절이 인연 따라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소극적인 처세 같으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처세가 바로 기다림이었다. 봄을 갖고 싶다 하여 겨울을 건너뛸 수 없는 것처럼 기다림이란 조용히 순리를 따르는 방편이었다.
혜공의 눈에는 최산두가 기다림을 체득한 선비같이 보였다. 그는 유가의 도학자이면서도 불가의 수도승 못지않게 인연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작년 가을에 조광조가 쌍봉사에 왔을 때 혜공은 이런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났다.
"세상을 맑히는 데 유가의 공이 큽니다. 삼강오륜을 벗어나면 소인이요, 그것을 지켜 실천하면 군자입니다. 얼마나 명쾌합니까. 하오나 명쾌한 것이 병통입니다. 불가에는 소인과 군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깨치면 모두가 부처입니다. 그러니 갈등이 없고 당(黨)이 없습니다. 투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연기(緣起)만 있을 뿐입니다."
조광조는 혜광의 변재(辯才)에 놀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조금은 아쉬워했다.
"사람이 하늘과 같다면야 어디 소인이 있고 군자가 따로 있겠소. 하늘의 도가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가에도 깨치지 못한 사람을 일러 중생이라 하지 않습니까. 중생이 있는 한 도덕이 있고, 질서가 있어야 세상이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불가에서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수도(修道)라면 사람이 하늘을 본받으려고 수신하는 것이 도학이 아니겠소. 다만 정치를 바로세우고자 달려오느라고 소인들에게 인을 주지 못하고 덕을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인과 덕을 불가에서는 자비라고 합니다."
빗줄기가 오락가락했다. 지금은 비가 잠시 멈추어 푸른 하늘이 언뜻 보였다. 혜공이 창을 열어젖히자 축축한 바람이 방안으로 몰려들었다.
"양공이 동암에서 기다리시는데 지금 만나시겠습니까."
"세창(世昌; 박상의 자)이 오면 함께 동암으로 올라가겠습니다."
광주에 내려와 있는 박상도 쌍봉사에 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박상은 조광조보다 8세 연상으로 성격이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로서 포용력이 부족한 듯하나 그는 담양부사 시절에 순창군수인 김정과 함께 폐비 신씨(중종의 정비) 복위를 위한 상소를 목숨 걸고 올려 폐비를 모의한 박원종, 남곤 등의 훈구파를 견제하고 조광조, 김식 등의 사림파에게 힘을 실어준 기폭제가 됐던 선비였다.
박상은 성격이 너무 대쪽같아서 대간들과 자주 부딪치므로 내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직으로만 돌았다. 조광조도 작년 봄에 그의 인품을 중종 앞에서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사람 된 품이 학문에 박식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재능과 덕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품행이 꿋꿋하고 결백하여 세상 사람들과 잘 휩쓸리지 않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의 눈에 나서 가끔 비웃음을 받기도 합니다. 그는 평생의 뜻을 오로지 퇴폐해진 것들을 일소하고 다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인재입니다.'
심정이 양천에 소요당(逍遙堂)을 짓고 기둥에 거는 주련을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에게 부탁했을 때 박상은 다음과 같이 글을 보내 심정을 조롱한 적이 있었다.
반산(半山)에 음식상을 차렸고
추학(秋壑)에 술잔을 열었도다.
半山排案俎
秋壑闢樽盂
쌍봉사 삼층목탑은 84년까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었는데 불이 나는 바람에 86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안되는 목조삼층탑이다. ⓒ프레시안 | |
심정은 주련을 뜯어내며 '간을 빼어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노옴!' 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반산은 왕안석(王安石)의 호이고, 추학은 가사도(賈似道)의 호인데, 그들 모두 송나라를 망친 대신이었던 것이다. 박상이 위와 같은 주련의 글을 보낸 것은 심정 너야말로 조선을 망쳐먹을 간신이라는 직격탄이었다.
박상이 호남 사림의 시조 격이 된 것은 아버지 박지홍이 본향인 충주에 머물지 않고 처가를 따라 광주 방하동(芳荷洞) 봉황산 아래 자리를 잡아 살았기 때문이었다.
박상은 최산두와 약속한 대로 정오가 조금 지나자 쌍봉사에 나타났다. 그는 거상이 끝났는지 상복을 벗고 있었다. 기묘년에 벼슬을 못하고 조광조 등과 어울리지 않은 것은 거상 중이기 때문이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그로 인해 그는 국문을 받고 삭탈관직 당하는 화는 피할 수 있었다.
최산두가 해탈문으로 달려 나가 박상을 맞아들였다.
"눌재(訥齋; 박상의 호) 형님, 죄인의 몸이라 문상을 가지 못해 송구합니다."
"경앙(景仰; 최산두의 자), 어려운 시절에 어찌 법도대로 살 수 있겠소. 그러니 미안해 할 것 없소."
"거상은 잘 치르셨는지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이오. 어머니도 잃고 동지들도 잃었으니 화를 입지 않은 나라고 어찌 안색이 좋을 리가 있겠소. 거상 중에 노천(김식의 자)의 소식을 듣고도 달려가 보지 못해 마음이 무겁소이다."
"눌재 형님, 천장(天章; 유성춘의 자)이나 형중(亨仲; 윤구의 자)에게 소식을 전했습니까."
"형중은 병으로 오지 못하겠다고 하고, 천장은 연락이 닿지 않았소."
유성춘은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파직되었고, 해남 출신인 윤구 역시 예조좌랑으로 있다가 파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 있는 처지였다. 박상과 유성춘, 윤구 등은 벼슬과 상관없이 교우가 두텁고 오래 전부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사람들은 호남의 삼걸이라고 불렀다.
"동부승지 어른도 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부승지 어른은 학포의 스승이니 학포가 잘 알 것이오."
양팽손의 스승이라 하면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별명이 붙은 송흠(宋欽)을 말했다. 양팽손이 16세 때 장성에서 나세찬, 송순 등을 가르치고 있던 송흠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삼마태수란 송흠이 수령의 임기가 끝날 때 다른 부임지로 가면서 세 마리의 말만 받아 가므로 생겨난 그의 별명이었다. 고을 백성들이 수령이 떠날 때 전별금으로 양마(良馬) 여덟 마리를 관행으로 주어 왔던 것인데, 송흠은 자신이 타는 말 1필과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을 각각 1필씩 전체 3마리의 말만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삼마태수란 단어는 백성들 사이에 어느덧 청백리를 상징하는 고사성어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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