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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양이 낳은 호남의 지성 신재 최산두

최길용 2015. 11. 6. 20:12

광양이 낳은 호남의 지성 신재 최산두
우리지역문화를 찾아서<7>
[204호] 2007년 03월 14일 (수) 22:26:31 이수영 기자

 

유배 14년동안 성리학과 도학정치로 큰 학자 길러


흔히 광양땅을 두고 ‘백운산’과 ‘최산두’를 떠올린다. 백운산은 옥룡사의 도선국사를 말하고 최산두는 정몽주-길재-김숙현-김종직-김굉필-조광조-최산두로 이어지는 사림파 신진사류들과 도학정치를 펴 기묘사화로 장장 15년의 유배를 당한 그다.

그는 화순군 동복에서 긴 유배속에도 조선조 5백년을 뒷받침하던 이념적 지주였던 유학정신과 도학의 정통을 이으며 호남유학의 거장 김인후와 유희춘을 길러냈다.

그 증표의 하나인 광양읍 우산리 유림회관 앞 봉양사. 선조 11년인 1578년 광양 현감이었던 정숙남이 최산두의 학덕과 절개를 숭모해 봉양사를 세워 제사를 지냈고 그후 유배지였던 화순에도 전남의 유림들이 도산서원을 세웠다. 신재는 조선조 사림파로서 주자학적 세계관이라는 그의 사상적 기반에는 ‘소학’을 행위의 준거로 삼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민본사상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확립으로 대변된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계의 맥을 이어 훈구.척신들을 배척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지역이 낳은 신재 최산두는…

 
신재 최산두는 성종13년인 1482년 4월10일 봉강면 저곡마을에서 한성판윤(정2품)에 증함을 받았던 아버지 한영과 어머니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영특해 이미 8세때 ‘영우두(永牛頭)’라는 시를 짓는 등 시문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다.

최산두는 14세때인 병진년(1496)그의 스승인 옥룡의 이천서씨 서극수의 딸과 결혼해 슬하에 병길이와 정길 두 아들을 뒀다.

신재 최산두는 그가 태중에 있을 때 어머니의 꿈에 북두성(北斗星)의 광채가 백운산(白雲山)에서 내렸다 하여 이름을 산두(山斗)라 지었다고 한다 그는 기묘명인(己卯名人)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 두구춘(斗衢春)으로 소문난 호남 3걸(傑)의 한 사람으로 우리고장은 물론 호남이 낳은 대표적 인물이다.

최산두는 옥룡면 동곡리 학사대에서 10년을 계획하고 공부하다 8년 만에 바위굴을 나오면서 우뚝 솟은 백운산에 대한 감흥을 "태산압후천무북(泰山壓後天無北)"이라고 한 후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할 때 한 초동이 나타나 "대해당전지실남(大海當前地失南)"이라 하면서 공부를 더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자극받은 최산두가 10년을 채워 학문을 완성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옥룡면 동곡리 바위굴인 학사대에서 10년 간 공부한 것을 토대로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등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19세 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등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 사람들은 낙중군자회(洛中君子會)라 했다.

그는 23세 때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수학했고 26세때는 유희춘(柳希春)에게 사숙했다. 31살 때 문과에 올라 이듬 해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이후 교리(校理), 박사(博士),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검토관(檢討官), 정언(正言)겸 수간관(授諫官)에 올랐다. 36세 때 옥홀을 하사받고 헌납, 이어 임금의 특명을 받아 공부하던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이듬 해 장령(掌令)으로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에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연루 화순 유배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개혁정치를 펴게 되었는데, 그때 개혁의 주역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신진 사류의 대표적 인물인 조광조였다.
이때 최산두도 조광조와 사림파의 일원으로서 그와 뜻을 같이해 그의 스승 김굉필로부터 물려받은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러한 왕도정치를 위해서는 부패와 비리를 청산하는 개혁이 필수적이었고, 따라서 그는 조광조가 소격서(昭格署)를 철폐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는 등 혁신적인 정책을 펼쳐나가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치는 기존의 훈구세력에게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현량과 실시로 인한 신진사류들의 등장은 훈구세력들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훈구세력들의 반발에 결정적으로 불을 댕긴 것은 반정 당시 정국공신들에 대한 훈적삭제(勳籍削除) 사건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훈구세력의 손을 들어주었고, 최산두 등 사림파들은 일거에 축출되었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1519년(중종 14년)기묘사화를 맞아 당시 의정부 사인으로 있던 최산두는 37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화순군 동복으로 유배되고 만다.
 

호남의병의 사상적 바탕


최산두의 수제자 하서 김인후는 생전에 이황의 ‘태극음양일물설’에 맞서 ‘천지간에 이(理)아닌 것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理)는 하루라도 없는 날이 없으며 조금이라도 결핍될 수 없으나 기(氣)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일종의 주리론자로 이(理)의 절대성·영원성을 강조했는데 그의 사상적 기반이 신재의 영향을 받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후 하서의 면면을 살펴보면 얼핏 퇴계의 학설에 가까운데 일본과 서양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에 위척사의 사상적 기반으로 한말의병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최산두의 제자 김인후는 노사의 학문을 이은 손자 기우만을 필두로 기삼연·기산도 등의 구국대열 참여는 최산두-김인후로 이어지는 주리사상이 행동으로 표출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사상이 주자학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원적인 사상 체계를 통한 애국정신은 매천 황현으로 이어지는 지금에도 여전히 높이 살만한 것이다.

60~70년대 중앙부처에는 광양출신들이 고위직에 가장 많았다는 얘기가 지금도 전해 오는데 그만큼 우리 광양은 김황원을 비롯 최산두·의병장 강희열·강희보, 전국에서 유일하게 2번씩이나 일어났던 광양민란, 매천 황현 등 그만큼 광양은 인물의 고장이라는게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에도 그러한 정신들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으며 달라진 시대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나마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적이다. 유교주의적 사상의 일부 한계와 폐단에도 불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매운 선비정신은 오늘날의 특히 산업화 일로속에 개발지상주의에 편승해 나약해진 우리지역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귀감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최산두는 유배 15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3년 후인 1536년 5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묘는 봉강면 부저리 뒷산 화전봉 아래 그의 조상들과 자리하고 있지만 그를 기리는 지금의 봉양사는 건물만 새로이 신축돼 문은 굳게 닫힌채로 쓸쓸히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광양시에 바란다. 더이상 봉양사 관리를 광양향교에 맡겨 전교가 손수 청소를 하게 해서는 안된다. 또한 국게 닫힌 봉양사 문을 활짝 열어 평상시 광양시민과 관광객들이 한 시대를 환희 밝힌 최산두 정신을 돌아보게 해야 한다.

출처 : 광양향토문화연구소
글쓴이 : 빈들에서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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