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계최씨자료

[스크랩] 내가 자란 노화도 마을 역사 (1)

최길용 2010. 7. 27. 08:23

2005년도 12월 중순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정말 잊을수 없는 해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한지 30여년이 넘어 동창회란 이름으로 많은 선후배 동문님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누구를 만나서 가슴을 열고 정을 나눌 수 있음은 얼마나 행복이겠습니까.
그 누군가가 오랜 고향의 벗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내 어릴적 노화가 그리워 이렇게 올려 봅니다


노화도 ( 1 )



노화도


이목리(梨木里)
조선시대 선조대(1568 - 1608년) 말기 함평 곽씨와 김해 김씨가 처음으로
입주 정착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밀양 박씨, 하동 정씨, 제주 고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동쪽에 큰 배나무 두그루가 있어서 배나무재
또는 "배난기미" 등으로 불리다가 일제시대에 한자 리명으로 이목리라 이름 하였다
마을은 천연 항으로 읍내 주요기관 등이 이목리에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완도와 목포 등지를 왕래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항상 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지금은 이목1구역을 아랫동네, 2구역을 웃동네라 불리운다.


북고리(北古里)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김해 김씨가 전작(田作) 위주의 영농으로 정착한
이래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부락의 서쪽에 있는 자연굴(窟)에서
용(龍)이 살았다 하여 용왕구미(龍王口味)라고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북고리(北古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리(新里)

조선시대 광해군(1609-1623)때에 김씨와 최씨가 입주하였다고 하나 알 수는 없고
나주 임씨와 김해 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새로 입주한 나주 임씨가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산리(堂山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초계 최씨(草溪 崔氏)가 제일 먼저 입주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해오는데 마을의 중심부에 수령이 400여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가
건재하고 있고 그 주위를 성역화 하여 매년 정월에 마을의 무사고와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당제(當祭)가 매년 열리고 있으니 아마도 최씨의 입주년대가
선조(宣祖:1568 ∼ 1608년)대가 아닌가 싶다. 자고로 당제를 준행(遵行)해 오는
마을이기에 마을 이름을 당산리(堂山里)라고 불렀던 것 같다.


잘포리
1930년대에 김해 김씨(金海 金氏) 한량(韓良)씨가 김양식 어업의 적지인 개포에서
거리상 편리한 지점임을 고려하여 소당리(邵堂里)에서 이주한 것이 시초(始初)였으며
김씨의 착안에 동조하여 계속 이주해 오는 주민의 수가 증가하여 이제는 큰 부락이
되었다. 마을 앞의 개포의 이름(잘포기미)을 인용하여 한자로 잘포리라고 하였다.

  
미라리(美羅里)
조선 영조(1725 - 1776년)때에 익산 소씨(益山 邵氏)가 처음으로 입주한 후
이어서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이 계속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고
천연적인 좋은 물과 인심과 인물이 아름답다는 뜻으로 미라리(美羅里)라고
칭하게 되었다


노록리(老鹿里)
1850년대에 당산리(堂山里)에 살던 김귀용씨가 노록도로 처음 이주하기 시작한
후에 밀양 박씨와 초계 최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섬의 형국이 늙고 점잖은 사슴과 같다고 하여 노록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셋담:해태 자연건조장으로 활용하기 좋은 지역이며 주변에 소나무가 많이 있다.
(마을 남쪽지역)

  


삼마리(三馬里)
조선시대 효종(孝宗)때에 김해 김씨, 밀양 박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입주한 김해 김씨와 밀양 박씨가 삼막사(三幕査)를 지었기에
삼막동(三幕洞)이라고 하였다가 그후 삼마리(三馬里)로 개칭되었다.   


소당리(邵堂里)
조선조 명종대에 밀양 박씨(密陽 朴氏)가 처음 이주한 후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형이 오목하고 따뜻하여 집 마당 같다 해서 소당리(小堂里)라
불러온 것인데 1945년 해방이후 소(小)자가 마땅치 않아 소(邵)자로 개서(改書)한
것이라고 한다.

 
염등리(鹽登里)
노화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한 마을이라 전해오는 곳으로서 조선시대
중종때에 전주 이씨가 최초로 살기 시작 하였다고 한다.
제일먼저 살기 시작한 전주 이씨가 제염을 하였기에 마을 이름을 염등리라
정하였고 마을 앞이 바다였는데 방죽 건너편을 염전등이라 하여 염등리라 하였다.


대당리(大堂里)
조선시대 명종때에 밀양 박씨(密陽 朴氏)가 최초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옛날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 위의 동산에 팽나무를 심고 주위에 석축을
쌓아 만들어 놓고 매년 음력 정월에 제위기복(祭位祈福)의 당제(堂祭)를 모시고
농악을 울리는 행사가 매년 전승되고 있어서 마을 이름을 대당리(大堂里)라고 호칭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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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리(都廳里)
조선시대에 세금(稅金)을 받던 기관으로 도봉청(都捧廳)이 이 마을에 설치되었기에
마을 이름을 도청리(都廳里)라 호칭하여 온 것이다.
삼도진(三島鎭)이 도청리에 소재하였으며 노아도(露兒島:노화도의 옛이름)는
고려초기부터 영암군(靈巖郡)에 속해 있었고 군진(軍鎭) 관찰로는 조선초기부터
어란진(於蘭鎭)에 속하였으며 명종(明宗)대에는 노아도(露兒島) 전역을
용동궁방(龍洞宮房)에 사부(賜付)하여 동궁방(洞宮房)에서 도청리(都廳里)에
도봉진(都捧鎭)을 설치하였다


포전리(布田里)
조선 선조대에 김해 김씨가 최초로 입주하였고 계속하여 경주 정씨와 하동 정씨,
밀양 박씨가 입주하여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바다가 마치 배를 널어놓은 듯 하여 포전리라 칭하였다고 한다.






노화도 옆 섬


바위바다


염전의 모습


노화도 굴앞 가족해수욕장


1988년도의 노화도 죽방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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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화중학교 동문회
글쓴이 : 박숙희(2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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