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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재윤두서필 <자화상>을 통해 살펴본 조선 17세기 초상화의 새경향

최길용 2017. 1. 4. 10:35

 

  초상화라는 장르는 회화 중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권계의 목적으로 제작된 그림이나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기록화, 순수 감상을 위한 산수화, 숭배의 대상의 종교화의 성격이 그 안에 조금씩 절충, 또는 가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초상화의 특질은 한편으로는 시대의 요구와 예술가의 독자적인 관념에 따라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조선시대는 어진과 공신상, 진영, 자화상 등 다양한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후기의 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명불허전, 명실공히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윤두서, <윤두서 자화상>, 견본채색, 38.5x20.5cm, 국보 240호, 해남 녹우당 소장]

 

  정면을 응시한 시선과 터럭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묘사한 정세한 테크닉은 오로지 인물의 정신을 드러내는데에만 이용되었습니다. 이는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 "정신을 그리는 것은 눈동자에 있다"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신 회화론에 합치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명성에 비해 그간 윤두서의 초상화에 대한 연구는 미진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철저한 양식분석과 시대적인 영향관계, 또는 동시기 작품과의 선후관계를 비교한 논문은 찾기 어려웠고, 대다수가 윤두서의 회화세계 속에서 득의작 또는 대표작으로만 언급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그린 또 다른 작품인 <심득경 초상>이 화풍이나 필법면에서 본 자화상과 연관될 부분이 적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잘 그렸다', '정신성이 구현되었다.' '전신사조, 기운생동하고 있다'라는 표현만으로 본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본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떤면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여러모로 윤두서의 자화상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에 직접 초발심하여 윤두서의 인물화 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윤두서가 그린 <소동파상>입니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전서체로 '동파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북송시대의 문인 소동파를 직접 보지도 못하였을 텐데, 어떻게 알고 그의 얼굴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의 비교를 위해서 임의적으로 도판의 좌우를 조정]

 

  17세기에는 중국으로 부터 다양한 서책이 조선으로 유입되었습니다. 해남종가 소장으로 성현도상[우측]이 전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중국의 산수판화집인 [[삼재도회]][좌측]에 삽도되어 있던 <소동파>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입니다. 윤두서의 인물화 학습의 초기단계는 바로 화보를 임모 방작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따라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주변에 풍경을 추가로 집어넣고, 기물을 배치하고 얼굴과 옷에 채색을 가하고 한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치는 듯한 자세를 가미함으로써, 본래의 작품 위에 서사적인 요소와 현장성을 추가하였습니다. 이 즈음되면,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윤두서는 초상화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여 마치 북송시대의 소동파를 조선시대의 현실 속으로 끌어내려고 한 것으로 생각될 정도입니다. 이후 판화나 회화를 임모, 방작한 결과는 윤두서의 인물화에 그대로 반영되게 됩니다. 이렇듯 판화나 전대의 회화를 통해 이루어진 회화적인 인물표현은 윤두서 초상화의 A형식으로 둘 수 있겠습니다.

 

 

 

 1. A형식 : 인물의 회화적 재현

 

  회화 표현에는 실제로 본 대상을 그려내는 것과, 흉중구확 또는 관념을 통해 대상을 표현하는 '심상의 재현(Dipicting of Images of the mind)' 두 가지의 방식이 있습니다. A형식은 '회화적'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심상의 재현'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초상화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인물이 그려질 때는 대게, 양식적이고 인물의 표현이 '회화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회화적인 모듈이나 작화방식의 기준에 준거하여 그려내었기 때문입니다. 윤두서의 인물화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전술한 <심득경 초상>이 있습니다.

 

 

[윤두서, <심득경 초상> 부분, 1710년, 견본채색, 160.3x87.7cm, 보물 1488호,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심득경 사후에 그려진 이 그림은 그 전후사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 인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1  이태호 선생님께서는 이 그림을 두고 '심득경이 세상을 떠난 지 4개월 후에 그린 초상화이다. 그렇게 볼 때, 윤두서가 심득경 초상을 그리기 위해 같은 옷을 입혀 모델을 세우고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옷 밖으로 나온 의자의 정확한 도식과 왼발을 살짝 든 포즈가 여간 자연스럽다....'라고 언급하며 윤두서가 이시기 새로운 초상화 양식을 개척하였다고 언급하였습니다.2 하지만 인물의 표현은 모델을 세우고 '실제로' 그렸다고 하기에는 작품이 다분히 '회화적'입니다. 그것은 윤두서의 자화상과 비교해보면 확연해집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물의 자세뿐만 아니라, 동파관, 옷주름, 옷 카라의 여밈상태에서 앞의 <소동파상>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태호 선생님께서도 '동파관을 쓰고 초록색 세조대의 도포를 걸친 채, 등받침이 없는 네모의자에 앉은 평상복 차림을 그린 점부터 파격이다'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삼재도회의 <소동파상>의 도상을 변용하여 적용한 것으로 생각되며, 오히려 파격적이라기 보다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학습과 이의 변용에 능통하였던 윤두서의 기량이 발휘된 초상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작품 안에는 이처럼 전체적으로 윤두서 초기의 인물화 제작의 '수련의 잔향'이 스며져 있습니다. 그것은 관념적인 그림에 반영된 회화적 기법의 기준에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심득경 초상>의 작품 제작시기는 앞의 <소동파상> 보다 올라갈 수 없으며 <자화상>보다는 앞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A형식 초상화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연관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윤두서, <노승도>, 18세기

 

언뜻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 작품 안에도, 윤두서의 중국판화 학습의 영향이 간취됩니다. 매부리로 휘어져 내려오는 콧날과 처진 콧망울, 눈주변의 주름을 깊게 처리하면서 콧날과는 연결되지 않는 점, 큼지막한 귓바퀴와 귓구멍주변의 주름을 그려내는 방식등에서 전체적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속에 자신의 이상을 투영합니다. 이 작품은 법식과 세속에 구애없이 탈속의 경지에 이르고 싶은 화가의 마음이 투영되어 선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섬세한 인물 내면묘사를 구현해 낸 뛰어난 작품입니다.

 

 

 1. B형식 : 인물의 사실적 재현

 

 중국에서는 15세기 중반 경부터 황제상 등에 정면관, 호피깔린 의자, 팔자형으로 한껏 벌린 발, 그리고 한 손은 각대를 잡고 한 손은 무릎에 놓는 포즈 등 새로운 요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특징적인 요소들은 그 후 점점 사대부상에 까지 확대되어 16세기말 17세기 초부터 청대 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유행되었습니다. 3 청나라가 들어선 후 조선조는 청나라와의 교섭이 더욱 빈번해지고 부경사행하는 조선조 사신들은 청국문물에 큰 호기심을 갖게되는데, 그 중에는 중국인 화가들을 시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가지고 온 예가 연행록이나 각종 산문 등에 산견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공식적, 비공식적 루트를 통해서 이러한 새로운 초상화의 형식이 17세기 중엽에 들어오게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1650년경에 청에서 제작된 <김육 초상>과 18세기 초에 제작된 <남구만 초상> 등입니다.

  

 

[胡炳, <김육 초상>, 1636, 견본채, 175.0×98.0cm,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김육 초상화의 우측 상단에 기록에 따르면, 1636년(숭덕 원년 : 병자호란의 해) 그가 동지사로 청나라에 갔을 때, 호병이라는 중국화사가 그를 모델로 하여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매우 구성이 번잡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세는 경직되어 있고, 인물의 얼굴표현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여 마치 마네킹을 바라보는 것같습니다. 눈동자는 정면을 노려보고 있지만 매서울뿐이며, 수염은 한올한올 그려져 있지만 각각이 일정한 모습으로 단조롭게 반복되어 있어 생동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형식이었던 정면상이라는 취세와 여타 기물과 배경의 새로운 배치 등, 새로운 요소들이 최소한 17세기 중반에는 조선에 전래되었음이 현전 작품으로 확인고 있습니다. 이후 이러한 새로운 초상화 형식은 18세기 초에 제작되는 초상화 작품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작자미상, 태조어진, 견본담채, 218.0x150.0cm, 19세기, 전주경기전 소장]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초상화의 형식의 특징은 다음의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면상의 자세로 시선이 부각되어 보는이를 압도하여 위엄있는 모습을 부각시킬수 있으며,

둘째, 기물 등 배경이 화려하게 첨가되어 인물의 정신과 분위기를 상승시킵니다.

마지막으로 신체의 양감과 태가 강조되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느낌을 전달하여 장대하고 당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조선말기부터는 어진제작에도 그 형식이 수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태조어진 상입니다.

 

시대가 19세기로 내려왔지만, 다시 18세기 초의 상황으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윤두서 역시 이러한 새로운 중국의 초상화의 형식에 크게 영향을 받게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들여온 새로운 화풍과 형식의 그림은 조선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 얼굴의 묘사에 나타난 채색이 탁하여 전체적으로 무거운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신체의 비율을 아래쪽으로 두고 있어 마치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인상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여 윤두서는 새로운 조선풍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시도를 하게됩니다. 바로 그것이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입니다.

 

 

 

 

 

 

 

 

 

 

  1. 심득경이 세상을 떠난 지 4개월 후에 그린 초상화라는 내용이 우측에 적혀있다. [본문으로]
  2. 이태호, 18세기 초상화풍의 변모와 카메라 옵스쿠라, 다시보는 우리초상의 세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p. 84. [본문으로]
  3. 조선미, 17세기 공신상에 대하여, 다시보는 우리 초상의 세계,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p. 67 [본문으로]
출처 : 四宜齋
글쓴이 : 하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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